약이 몇개 안 남았다

by 에스텔


병원에서 지어온 약은 28일치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56개의 소분된 약봉투를 받았다. 저녁에 먹는 약은 수면에 도움이 된다. 의사 선생님의 처방이 그랬고 복약지도 안내에도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있다. 휴대폰 보다가 잠드는 게 많은 이들의 일상인만큼 나도 마찬가진데 약을 먹고 누우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어서 아침에 배터리가 방전된 핸드폰을 마주하는 일이 잦다. 손에 쥐고 잠들어 베개 옆에 엎어져 있을 때도 있다.


분명 아침약과 저녁약이 똑같이 28개였는데 어느샌가 헤아려보면 저녁약이 현저히 줄어있다. 아침에는 깜박해도 저녁은 꼬박꼬박 챙긴 탓이다. 아침은 깜박하고 넘겨도 당장 물리적으로 내게 방해가 되지 않지만 저녁약은 안 먹으면 그날 잠을 못 자기 때문에 깜박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잊지 않고 복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지막 동아줄을 움켜쥐는 심정으로 약을 털어 넣는다. 이 조그만 화학물질 덩어리가 동아줄씩이나 되어야 하는 내 정신건강 상태가 한스럽다. 아침마다 알약을 삼키면서 나는 내 절망도 같이 삼켜지는 상상을 한다. 절망뿐 아니라 거칠고 날카로워 상처만 잔뜩 내고 있는 뾰족한 조각들을 함께 삼켜 위산으로 녹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절망 혐오 불안 우울 그리고 또 절망... 끝없는 절망...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절망케 하는가


지독하리만치 성실한 아침해

언제 기능이 멎을지 알 수 없는 육신

그 무엇도 안정적이지 못한 내 삶의 경로

내 의지대로 쓸 수 없는 하루, 그리고 또 하루


한동안 화제였던 넷플릭스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내가 제일 부러웠던 건 삶의 목표가 뚜렷했던 문동은 그 자체였다. 영혼도, 육신도 모두 망가뜨린 가해자 박연진을 송두리째 산산조각 내기 위해 본인을 원료로 태워가며 복수를 망설이지 않는 확고한 삶의 태도가 부러웠다.


폭력에 폭력을 더하는 더없이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들을 그리고 있는데, 그래서 부러워할 만한 건 단 하나도 없어야 맞는 내용인데, 오로지 삶의 목표가 선명하다는 이유 하나만이 부러웠다. 끝내는 폐허만이 남을 거라는 걸 문동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 발걸음이.


더글로리의 문동은이 워낙 강렬해서 예시로 들었을 뿐.

실상 나는 모든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부럽다.

그들은 생애 의지와 살고자 하는 마음과 미래를 향한 희망이 어쩜 그토록 차고 넘칠 수 있는지.

절망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고작, 죽기를 선택했을 때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고통이 무서워서, 그래서 삶을 이어나가고 있을 뿐인데.


스스로에게 오늘 하루도 살아내느라 애썼다고 말해주면 어떻겠냐는 상담선생님의 조언이 애틋하면서도 저 따듯한 문장이 내 몫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응당 들어야 할 이들은 따로 있는 것 같아서. 그게 나는 아닌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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