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러먹었다.
범접이 유행이다. 월드 오브 스트릿우먼파이터의 그 범접이 맞다. 화제의 메가크루 영상을 찾아봤다.
과히 열광할만하다. 이름에 걸맞은 춤사위였다.
갑자기 명사로 쓰일 때 범접의 뜻이 궁금했다. 보통 우리가 명사로 쓸 때 범접의 한자어가 호랑이를 범이라 부를 때 쓰이는 한자와 같을까? 호랑이를 범이라고 칭하기도 하니까. 일차원적으로 생각해 보자니 그럴듯했다. 감히 한낱 인간의 몸으로 맹수의 제왕에게 근접하려 드는 용기 정도는 되어야 범접의 뜻이 완성될 것 같았다. 기대에 차서 포털사이트 어학사전을 검색해 봤다.
전혀 아니었다. 괜히 혼자 기대하고 혼자 미약하게 실망했다. 이래서 한자공부를 충실히 했어야 했는데...
가끔 마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단어 하나에 꽂혀서 찾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양배추와 양상추의 양이 서양의 양과 같은 한자를 쓴다는 걸 알고 적잖이 신기했던 적이 있다. 배추와 상추가 이미 있는데 앞에 양이 붙은 양배추와 양상추는 서양에서 왔다는 뜻인가 싶었는데 진짜였다. (어릴 때 대충 찾아본 거라 희미한 기억이다. 틀린 정보일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책이 있다.(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민음사)
퍼내도 퍼내도 끝없이 쏟아지는 모래가 주인공뿐 아니라 내게도 상당히 절망적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입 안에서 모래 알갱이가 씹히는 느낌이었다. 호흡할 때마다 모래먼지가 폐에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오로지 활자로 독자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작가의 글솜씨가 대단했다. 그러다 문득 사과의 사가 모래 사를 쓰더라는 말이 생각났다. 입안에서 까끌까끌하게 굴러가는 듯한 이 불쾌감이 달콤하고 아삭한 사과와 같은 뜻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지금도 사실 믿기지 않아서 다시 검색해 봤다.) 책을 읽고 난 후유증이 한창 남아있을 때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라 도무지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둘이 왜 같은 한자를 쓰는지 집착적으로 찾아본 적이 있는데 별 성과는 없었다. 여러 가지 가설이 있었던 것만 기억난다. 한동안 사과를 먹을 때마다 모래를 씹는 듯한 착각도 같이 느껴야 했던 건 여담이다.
요즘은 말을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내가 뱉는 말의 뜻을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찾아본 뒤 말을 하려고 부지런히 노력한다. 특히 메시지를 한창 쓰다가 지금 내가 쓰는 이 단어의 뜻이 내가 완성하려는 문장에 어울리는 단어가 맞는지 한 번 정도는 찾아본다. 애매하게 알고 있을 때 특히 그렇다. 단순히 멋 부리거나 꾸며내기 위해 있어 보이는 단어를 쓰려고 굳이 문장에 안 맞는 단어를 가져다 쓰는 건 아닌지 의심될 때가 많아서 그렇다.
k-pop 가사에 한 획을 그은 김이나 작사가님이 했던 말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모르는 단어를 가사에 쓰고 싶지 않다고, 정확한 뜻도 모른 채 그냥 써버리면 상당히 멋없어 보인다고 하셨던가.
나는 작사가도 뭣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쓰는 말이 적어도 나 만큼은 그 뜻과 쓰임새를 확실히 알고 있는 채로 쓰고 싶다. 상대방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물어봤을 때 나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어쩐지 해가 갈수록 내가 뱉는 말에 내가 짓눌리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너무 생각 없이 말하고 다니는 건 아닐까 싶은 의심도 가끔 든다. 유행이나 밈처럼 순간 즐겁자고 쓰는 말에 혹시 혐오의 뜻이 내포되어 있진 않은지 유래를 찾아보기도 한다. 조심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비해 별 성과는 없는 것 같다는 게 제일 한심한 지점이긴 한데...
역시 이번 생엔 글러먹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