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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Jan 25. 2020

이런 우리가 살고 있다

독감에 걸린 자연이와 24시간 붙어 지낸 지 일주일이 지났다. 신기하게도 자연이는 아프면서 말이 확 늘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를 놀라게 한다.     


며칠 전 저녁에는 갑자기 “엄마 고마워” “아빠도 고마워” “할머니 고마워”(물론 정확한 ‘할머니’의 발음은 아니다. ‘멍멍이’로 들릴 때가 더 많다)라는 말을 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해줘서 엄마도 고마워요” 했더니 찡긋 웃으면서 애교까지 선보인다. 또 어제는 밥을 먹다 재채기를 했는데 밥풀이 내 손등에 묻으니 “엄마 미안해” 하는 게 아닌가. 자기 전에는 머리를 묶어주었더니 “엄마, 머리 묶어줘서 고마워요”라는 말까지 했다.    

  

‘미안해’ 혹은 ‘고마워’를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는지 아는 것도 신기했지만 사소한 것들에까지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는 아이다운 마음씨에 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런 말을 들으니 선물은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니 이런 모습을 고스란히 다 지켜볼 수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요즘 야근이 잦다. 그런데 남편의 야근은 야근으로만 끝나는 않는다. 야근 후 식사와 음주가 이어져 새벽 2~3시가 되어야 들어온다. 자연이 독감이 다 나을 때까지는 집이든 밖이든 술을 먹지 않기로 했었다. 독감 초기에 열이 하도 올라 걱정이 돼, 응급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 술은 먹지 않는 게 좋겠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 하나 없이 또 술이라니. 나와 한 얘기를 기억이나 할까. 그보다, 위내시경을 받은 시어머니가 큰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날까지 이러고 싶을까 싶다.

      

자연이가 잠든 후 살며시 나와 거실의 장난감들을 정리하고 마른빨래를 갰다. 빨래를 개며 연락도 없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먹는 남편의 버릇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냉정하고 현명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미 내 마음에 화가 찼기 때문이다.  

   

이번 설에 시댁 식구 모인 자리에서 남편의 행태를 고발할까? 아니야 남편의 구역에서 고발하는 건 별 효과가 없어, 그럼 친정에 갔을 때 친정 부모님 앞에서 고자질을 할까? 남편의 체면도 있는데 그건 좀 심한 건가? 아니지 사위도 자식인데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야단 좀 맞을 수도 있지…. 판단은 하지 못한 채 심장만 요동쳤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딪혀봤다. 술 먹고 들어온 남편과 새벽에 언쟁을 벌인 적도 있고, 다음 날 제정신인 남편과 대화를 하며 다짐을 받아낸 적도 있다. 하지만 술을 즐기는 남편과 지금은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나의 의견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합의를 해도 실전에서는 무너져버린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회사를 1박 2일로 다녀서 피곤하겠어”라는 나의 말에 남편은 별 대꾸가 없었다. 평소 말이 많지 않은 남편은 또 말을 아낀다. 대꾸가 없으니 나도 더 물고 늘어지고 싶지 않았다. 더 얘기해봐야 내 감정만 상한다는 걸 안다. 이번 일에 대해 한 번은 진지하게 얘기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지나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판단 유보다.           


일찍 퇴근해서 오랜만에 같이 저녁을 보낸 남편은 자연이의 말솜씨에 깜짝 놀랐다. 자연이는 나한텐 항상 같이 부르자고 했던 노래도 아빠 앞에서는 또박또박 발음하며 혼자 자신 있게 불렀다. 내가 남편과 같이 공유하고 싶었던 장면들을 ‘드디어’ 남편도 보게 되어 좋았다. 이 순간만큼은 ‘화목한’ 가정이다.      


한 집에 이렇게 극과 극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쑥쑥 커 가는 모습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딸과 가끔이지만 내 마음에 불을 일게 하는 (이제는 빼박인) 40대 남편이 한 집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을 생각하며 늦은 시간, 뭐라도 쓰려는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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