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by Gin

[ 지은아, 집에 좀 들러... 아버지가 찾으셔. ]

오전 알바가 끝나고 핸드폰을 확인한 지은의 눈에 낯익은 번호가 보였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알려주지 않아도 꾸준히 보내오는 문자는 지겹기만 했다.
반갑지 않은 연락 때문인지, 불쾌했던 아침의 시작 때문인지 오늘따라 약 기운도 빠르게 사라지는 것 같다.
불안함과 함께 떨려오는 손을 느끼며 빠르게 약을 찾았다.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약봉지 소리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 지은아... "

오후 알바가 없는 날이었기에 편의점에서 가벼운 요깃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지은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발을 멈춰 세웠다.
바닥만 보면서 걷던 지은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지독하게 끈질긴 악연이었다.

" ... 여긴... 어,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

지은은 떨리는 손은 감추며 말했다.
그와 닮은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알레르기가 돋는 듯 괴로워졌다.
눈가가 퀭하니 어두운 것이 며칠 밤을 지새운 사람처럼 보였다.

눈앞의 여인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지은은 무의식적으로 발을 뒤로 뺐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지은을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지은은 주변을 살피고는 일으켜 세우려 다가섰다.

" 저기, 지은아... 우리 미, 민욱이...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될까? "

" ... 고모...? "

" 진짜... 다시는 너 찾아오지 않을게! 정말! 죽어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제발, 딱! 한 번만... 응? 마지막으로 한 번만... 우리 민욱이 좀 만나주면 안 되겠니...? "

믿기지 않는 말을 내뱉는 여인을 황망하게 바라보며 지은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지은의 다리를 붙들고는 억지를 부렸다.

" 고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

지은은 원망과 함께 분노가 치솟았지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는 그녀를 차마 매정하게 내칠 수 없어서 자신을 늪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그녀를 어르고 타일렀다.
매번 자신이 도망을 가도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찾아내어 상처를 헤집었다.

" 너, 너밖에 없대... 널 봐야... 그래야 살 것 같대... "

" 고모...! "

" 제발... 제발 한 번만... 응? 너, 너도 우리 민욱이 잘 따랐잖니... "

" 고모, 제가 죽어야... 그래야 속이 편하시겠어요? "

" 너 때문에 내 새끼는 이미 죽어가고 있어! "

" 그래서 사라져 드렸잖아요... 죽지도 못하고 숨어 살고 있잖아요! "

" 아, 아니야... 미안해, 지은아. 소리 질러서 미안해... 고모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그래.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야... 우리 아들 좀 살려 주라, 응?
우리, 우리 민욱이 좀... 한 번만 만나줘, 그러면 내가 다시는 너 안 찾아올게! "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그녀의 애원에 지은은 눈앞이 어지러웠다.
자기 자식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람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일이었구나 싶었다.

" 제정신이세요...? 고모, 저 고모 조카예요... 그건 아세요? "

" 내 새끼가 너 아니면 죽어 버리겠다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니? "

" 그럼 저는요...? 제 마음은요...? "

" 너한테 미안하기는 한데... 난 내 새끼부터 살리고 봐야겠다. 가자. "

지은의 절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지 팔을 잡아 끄는 그녀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손목이 으스러질 듯 아팠지만 지은은 힘겹게 버텼다.
길 한복판에서 데려가려는 자와 버티는 자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지은은 자신에게 매달려 눈에 빛을 잃고 달려드는 고모의 모습에 마치 저승사자가 자신을 붙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 막히는 두려움과 함께 과거, 자신의 마음을 짓밟는데 일조했던 고모의 말들이 떠올라 배신감에 휩싸였다.

[ 어린년이 꼬시는 데 안 넘어가고 참기만 할 남자애가 어디 있어! ]

[ 저년이 먼저 몸으로 들이댔겠지! ]

[ 더럽고 천박한 것! 이 짐승만도 못 한 년아! ]

[ 어디 사창가에 가서나 몸 굴릴 것이지,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 ]

지은은 몰아치는 감정으로 인해 점차 몸이 떨려왔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아픔과 동시에, 붙들린 손목에서부터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르는 수많은 벌레들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지은의 눈에 비친 것은 붙들린 팔이 벌레들에게 먹혀가며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

" 아, 안돼...! 놔!... 놓으라고! 시, 싫어...! 싫어! 싫어!! "

발작처럼 이어지는 환각에 지은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괴물을 힘껏 떨쳐냈다.
여리기만 한 몸에서 괴력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살고자 발버둥 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은에게 매달려 고집을 부리던 여인도 지은의 발작을 보고는 놀라 손을 놓쳤다.

떨어져 나간 팔을 연신 긁어대며, 눈에 초점을 잃은 채 소리를 질러대는 지은이 보였다.
옷 위를 긁어대는 것으로 모자랐는지, 앙상한 팔을 드러내며 피가 나도록 긁어대는 지은의 행동에 여인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 싫어! 하지 마...! 그만, 그만, 그만! 제발! 싫단 말이야... 싫다고! "

이내 온몸을 긁어가며 정신을 놓은 듯 흐느끼는 지은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지은은 환각으로 인해 보이는 처참한 지옥 속에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 약! 약이 어디 있지? 누가 제발 약 좀 줘...! '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팔을 쥐어뜯으면서도 주변을 더듬거리며 약봉지를 찾아 헤매었다.
손 끝에는 진득하고 따뜻한 것이 묻어나고, 코 끝에 비릿한 혈향이 감돌았다.
진한 피 비린내에 역겨움이 몰려들 때, 지은은 빠르게 약을 씹어 삼키고는 눈을 감고 연신 되뇌었다.

" 이,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다... 현실이 아니야, 꿈이야. 꿈일 뿐이야... "

약 기운이 서서히 퍼지자 생살을 파 먹히는 끔찍한 고통이 차츰 잦아들었다.
고통이 줄어들며 멍하니 눈을 들어 올리자, 심하게 긁혀 여기저기 피가 새어 나오는 너절한 팔이 보였다.
그럼에도 지은은 옅게 웃음 지으며 안도를 했다.
이내 눈앞이 점멸되었다.

" 고모가 거기를 왜 찾아 가요! "

" 당신, 그만 못해? "

" 아니, 나는 그저... 민욱이 한번 살려보려고... "

" 우리 지은이는요...? 우리 지은이는요! "

" 그만하라고. "

" 대체 뭘 그만해요! 저기 누워있는 우리 애는 안 보여요? 우리 애 망가진 건 안 보이냐고! "

" 올케... 미안해... 미안한데, 지은이 깨면... "

" 너도 그만해라. "

" 오빠! "

희미한 정신 사이로 흐느낌과 고성이 섞여 들려온다.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어지러움이 밀려들었다.
눈을 들어 처음 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그제야 코 끝에 와닿는 익숙한 소독약 냄새, 버석하고 딱딱한 침대의 감촉에 지은은 자신이 병원에 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뒤로 한 채, 표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지은은 무덤덤했다.
몸을 일으켜 세워 창 밖을 보니 다행히 자신이 아는 곳임에 분명했다.
이 전에도 입원해 본 적이 있던 지은은, 익숙한 듯 호출 버튼을 눌러 자신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이내 데스크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리며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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