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by Gin

비가 추적, 추적 내리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아침 하늘이 유독 화창하게 맑았던지라 비가 올 수 있다는 아침 뉴스의 내용 따위는 가볍게 지나쳤다.

하교 시간이 되어 갈수록 맑았던 하늘은 미술 시간이 끝난 뒤 수채통에 든 물처럼 혼탁하고 뿌옇게 변해갔다.
하교 길부터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는 점차 거세어져, 어느새 얇은 교복 셔츠를 투명하게 바꾸었다.

지은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집안 분위기도 사뭇 전과는 달라졌다.
사춘기에 접어든 지은을 위한 것인지, 자주 집에 드나들던 사촌들도 고모들을 제외하고서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도록 부모님의 배려 또한 이어졌다.
그 덕분에 지은은 밝았던 웃음을 서서히 되찾아 갔고, 민욱과의 일은 그저 악몽 속의 이야기쯤으로 여기며 기억 속 깊은 곳에 묻어 둘 수 있었다.

" 으으, 추워... 다녀왔습니다. "

물에 빠진 쥐처럼 폭삭 젖어버린 지은은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싸한 기분에 몸을 움츠렸다.
평소와 다른 적막감에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젖은 몸의 추위 때문이라 여겼다.

지이잉- 하며 길게 울리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거실로 나오자 연거푸 몸을 떨고 있는 핸드폰이 보였다.
이내 진동이 멈추기에 액정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와 있었다.

" 뭐지...? "

번갈아가며 남겨진 부모님의 부재중 전화에 지은은 의아함을 느꼈다.
텅 빈 집안의 느낌에 서둘러 방마다 문을 열어 보았다.
안방, 거실, 주방 어디를 찾아보아도 차가운 공기만이 자리할 뿐 머물렀던 온기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띵동-

바닥에 깔리며 차오르는 연기 같이 불안감이 발 끝에 스며들고 있었다.
울리는 벨 소리에 흠칫 놀란 지은은 반짝이는 인터폰의 불빛이 압박감처럼 느껴졌다.

" ... 누구세요? "

" 나야, 지은아. 문 좀 열어 줄래? "

" 오빠가 왜...? "

인터폰으로 대화를 하는 도중 다시 한번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 아빠 회사 상사분이 돌아가셔서 엄마랑 아빠 장례식장에 가고 있어. ]

[ 지방으로 가게 되어서 이틀 정도 집 비울 거야. 아빠가 너 혼자 있는 건 불안하다고 하셔서 고모한테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해 뒀어. ]

지은은 인터폰 앞에서 서성이는 민욱을 보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란스러운 마음 때문인지 핸드폰을 쥔 손이 점차 떨려왔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

" 아이씨, 왜 안 받는 거야! "

띵동-.

재차 울리는 벨 소리에 지은의 마음은 한 없이 조급해져 왔다.
이어지는 통화음 소리가 너무도 길게 느껴져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 지은아, 비가 많이 와서 밖이 꽤 추운데... 문 좀 열어 주면 안 될까? "

인터폰을 통해 들리는 민욱의 목소리에 더욱 조급해진 지은은 계속해서 연결이 되지 않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고모에게 부탁을 했다는데 집에 온 것은 민욱이라는 사실에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 찼다.

' 왜? 왜 하필 오빠가 온 거야? '

' 그보다 그 멀리 사는 고모에게 굳이 연락할 필요가 있었을까? '

지은의 머릿속에서는 문을 열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과 춥다던 민욱의 말이 엎치락뒤치락 힘 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지은의 힘겨운 고민은 끝내 연결되지 않는 전화로 인해 끝을 맺었다.
민욱과 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춥다던 민욱의 말이 결국 지은의 마음을 움직여 버렸다.

" 휴우, 잘 지냈어? 비가 꽤 많이 온다. "

지은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수건을 건네며 민욱과 마주했다.
자신보다 더 한껏 젖은 민욱의 입술이 살짝 파란 것이, 문 밖에서 기다리게 한 것을 미안하게 했다.

반갑게 민욱의 인사에도 지은은 입을 닫았다.
답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돌려보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좁은 현관에 마주 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었다.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메웠다.

" ... 고모가 오시는 거 아니었어...? "

" 아아, 엄마가 나한테 연락해서 가보라고 하셨어. "

" 오빠한테...? "

" 응, 나 얼마 전에 취직해서 서울로 이사 왔거든. "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가며 민욱이 반갑게 웃었다.
지은은 자신 앞에 선 사람이 기억 속의 악몽이 맞는지 점차 헷갈려 왔다.
어릴 적 보아 왔던 그의 익숙한 얼굴이 낯설게 다가오고, 그 낯섦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 미안한데, 혹시 갈아입을 만한 것이 있을까? "

민욱은 재차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어색하게 물었다.
이내 무겁게 쳐진 외투와 함께 민욱의 몸에 달라붙은 투명한 셔츠가 지은의 눈에 들어왔다.

" 자, 잠시만. 아, 아버지 옷이 어디 있더라... "

지은은 당황한 얼굴을 감추며 빠르게 안방으로 들어갔다.
민욱은 스치듯 보인 지은의 표정을 보고는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지은은 옷장을 뒤지며 사이즈를 확인하다가 문득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문 앞에서 본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젖은 셔츠가 몸에 붙어 그의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냈던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옷장 속 보송한 셔츠가 손 끝에 보드랍게 닿았지만, 촉촉하게 젖어 있던 실루엣이 마음을 불편하게 흔들어 놓았다.

" 미쳤어? 왜 이래... "

지은은 옅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양손으로 뺨을 여러 번 두드린 뒤 옷을 들고 민욱에게로 갔다.

" 저, 저쪽이 욕실이야. "

" 아, 고마워. 잠시 실례할게. "

민욱은 건네어 주는 옷을 받아 들고서 살포시 웃으며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이 닫히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작게만 들리던 빗소리가 소리를 키우며 물소리를 가려 주었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흘러내리듯, 그녀의 마음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살포시 웃던 민욱의 입꼬리에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가슴을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울림이 혹여 밖에까지 퍼질까 봐 지은은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주방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갈증에 컵을 집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마치 목이 마른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인 듯, 그녀의 가슴이 묘하게 답답해졌다.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이내 멈추는 순간, 지은의 손도 물컵 위에서 얼어붙었다.
그가 신경 쓰였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우연이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조용히 다독이며 되뇌어 보았다.
그래, 그저 그래서 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려 애썼다.

" 이 옷 딱 맞네. 고마워, 지은아. "

욕실에서 나온 민욱은 지은이 건넨 옷을 몸에 맞춰 정돈하며 말했다.
지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멈추었던 손을 움직여 물을 마셨다.
민욱은 왠지 부끄러워하는 듯한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뭐 좀 만들어 줄까? "

" 아니야, 괜찮아.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

지은은 단번에 거절하려 했지만, 민욱은 이미 냉장고 문을 열고 재료를 찾고 있었다.
연신 오오, 소리를 내며 눈을 반짝이던 민욱은 소스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 스파게티 어때? 금방 만들 수 있어. "

" 괜찮은데... "

" 잠깐만 있어봐. "

어깨를 토닥이며 다정스레 이야기 한 민욱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꺼내고 요리를 시작했다.
민욱의 손길이 스쳐 지나간 어깨가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지은은 그곳에 조심스레 손을 얹으며,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눈길로 그를 뒷모습을 좇았다.

팬 위에서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함께 부엌에는 은은한 향이 퍼져 나갔다.
지은은 그의 능숙해 보이는 손놀림을 조용히 지켜보며, 어딘가 달라 보이는 민욱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다.

" 요리 잘하네? "

무심코 나온 말에 지은이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욱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면서도 눈은 팬을 향해 있었다.

" 회사 다니면서 혼자 살아야 하잖아. 자연스럽게 늘더라고. "

그의 말에 지은은 살짝 놀랐다.
스스로 생활을 꾸려가는 민욱의 모습이 새삼 어른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스파게티가 완성되고, 둘은 거실 식탁에 마주 앉았다.
민욱이 건네준 접시를 받아 들고 천천히 한 입 먹은 지은은 눈이 커졌다.

" 맛있다...! "

" 그렇지? 나름 레시피도 연구했다고. "

민욱은 어릴 때와 같은 표정으로 말갛게 웃는 지은을 보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식사를 하며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지은은 학교 생활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민욱은 갓 시작한 회사 생활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들며 웃음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왔다.
지은은 민욱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악몽은 이 순간의 온기와 함께 점점 옅어지는 것만 같았다.

' 그땐 정말 꿈이었지 않을까...? '

그녀는 그렇게 불안 속에 있던 자신을 안심시켰다.
어릴 때와 다를 것 없는 지은과 민욱의 사이에는 따듯하고 안온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민욱은 경계를 낮추고 자신에게 편안히 다가오는 지은을 보며 따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의 눈빛 사이에는 티 나지 않는 불꽃이 살며시 감추어져 있었다.
따듯함과 다정함 사이에 숨겨진 무엇인가는, 지은은 느끼지 못할 만큼 옅게 생기는 안개처럼 서서히 묘한 긴장감을 공간 안에 채워갔다.

이전 06화#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