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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지안 Nov 22. 2020

꿈에서 본 마지막 3일

마지막 3일,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해보면, 우리는 '지구 멸망의 날' 같은 것을 쉽게 떠올리고 상상해볼 수 있다. 영화든, 뉴스든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잔상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지구 멸망을 비롯한 샤머니즘에 기초한 거대한 힘에 의한 심판 같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루하루 치열하고 바쁘게 일하고, 가끔 여행을 떠나며 대체로 심플하고 현실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아주 가끔 읽은 소설(그나마도 매우 현실적인 내용)을 제외하고는 자기 계발서나 내가 일하는 분야의 책들을 읽었고, 내 업무에 도움이 되거나 인문학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강연을 들었다.


대부분 치열하게 사는 현실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공부와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나는, SF 영화를 본적도 별로 없고 '지구 멸망'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상상을 해보기는 커녕, '전쟁터 같이 바쁜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있나?'라는 마인드로 살아왔다.


꿈에서도 그랬다. 일하면서 너무 힘들 때는 매일 악몽을 꾼 적이 많았는데, 꿈속에서도 늘 현실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일어나고, 거의 대부분 내가 하고 있는 일, 고민, 걱정과 관련된 경우였다. 꿈속에서도 나는 늘 바빴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내가 며칠 전, 마치 좀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꿈을 꿨는데, 꿈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좀비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공포는 물론이고 액션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꾼 꿈은 신기하게도 그런 영화의 장면들 같았다.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장면들 같다는 것을 아는 걸까? 아마도 광고에서......?)




꿈의 기억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지진이라도 난 듯,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려 철근이 드러난 건물들 사이에 내가 서있다. 콘크리트 부스러기, 깨져버린 벽돌들이 바닥에 이리저리 나뒹구는 그 장면의 색이 선명하지가 않다. 마치 인스타그램의 색을 톤 다운시키는 필터를 씌운 것처럼 완전히 흑백도 아닌 것이 완전히 컬러도 아닌 애매한 느낌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저기서 진한 화장을 한 좀비 같은 얼굴을 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에게 다가온다.


"언니, 오늘이 첫날인가 봐?"


그때 뭔가 '아, 여기는 이승 아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내가 아직 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자신이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언니, 살아있을 때 직업이 뭐였어?"


그 질문을 듣는데 왼쪽 방향에 있는 깨진 거울로 어렴풋이 내 얼굴이 비친다. 내 얼굴도 그녀의 얼굴색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아, 내가 죽은 거구나. 확실하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나... 교사였는데..."


나는 그녀와 약간의 거리를 두며 말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녀의 표정과 눈빛이 마치 '아이고, 이 언니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내가 왜 죽었는지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큰 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위험한 상황에 놓인 기억이 없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좌우로 시선을 돌려 폐허가 되어버린 회색 빛의 도시를 쭉 스캔했다. 삭막하고 황량한 것은 물론이고, 더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내 표정에 드러났는지, 좀비 같은 얼굴의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이거 해볼래? 어차피 3일은 여기 있어야 해. 언니는 첫날이니까 나보다 더 있어야겠다. 이거 하면서 지내다 보면...... 진짜로 떠나는 거지."


나는 그녀가 내민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설탕인지 소금인지 모를 하얀 가루가 보였다. 뉴스에서 봤던 마약 가루임이 분명했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탈출이라기보다는 내가 살던 그곳, 그러니까 이승(?)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았다.


"무서워서 그래?"


그녀가 어린아이를 대하듯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은 하지 못한 채,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그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시멘트 가루가 날리는 것인지,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이 시야를 가려서 아주 가까운 것이 아니면 잘 보이지 않았다. 검색할 스마트폰은 없었다. 도움을 청할 지인은 당연히 없었다. 혼자서 지금 이 곳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계속해서 길을 헤매면서 마주친 사람들은 다 정상이 아니었다. 다들 술에 만취한 사람, 아니 좀비 같았고 배려, 예의, 존중, 사랑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세상이었다. 뉴스에 나올 법한 범죄들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상황을 보고 웃고 즐기거나 무관심했다. 그나마 아까 처음에 만났던 20대 중반의 그녀가 가장 배려심이 있고 정상적인 사람인 듯했다.


길을 돌아다녀봐도 거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듯했다. 아까 그녀가 말한 대로 '3일 후에 진짜로 떠나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좀비 같은 이 얼굴과 몸으로 마약이나 하면서 3일을 보내고 떠나야 할까? 이곳이 '사후 세계'라면 내가 무엇을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그냥 저 사람들처럼 막살아도 되는 걸까? 아니다, 이미 죽었는데 무엇이 중요한가?


내가 가진 가치관과 그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들이 흔들리는 순간, 눈을 떴다.

 



꿈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그냥 좀비 꿈. 헛웃음이 나왔다. 남들은 가볍게 즐길 말한 좀비 영화 같은 꿈에서 나는 무슨 심오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걸까?


나는 지금 인생의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일을 하려고 준비하면서도, 자꾸만 지난 10년간 했던 일들이 그립다. 그 치열하게 바쁘고 죽을 만큼 힘들었던 그날들로 이상하리만큼 돌아가고 싶다.


4차 산업혁명을 떠들어대던 나는 결국 3차 산업을 그리워한다. 마치 며칠 전에 꾼 좀비 꿈처럼, 나는 지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과 동시에, 기존에 내가 가졌던 직업에 대한 가치관과 그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옳다고 믿어왔던 3차 산업에서의 신념들을 바꿔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꿈속 그녀가 말한 것처럼, 이 준비기간이 끝나면 나는 영영 3차 산업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3차 산업의 문은 닫히고 4차 산업의 문이 열리면 또 다른 가치관과 신념을 정립하고 그 안에서 다음 10년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 테니까.


혼란의 3일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마약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혼란 속에서 나를 무너뜨리지도 않기로 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나의 지난 삶을 추억하면서 떠나보내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면서 그 3일을 견디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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