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서적 흙수저입니다
흙수저인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정서적 흙수저'라는 개념이 알려진 것도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그 전에만 해도 (어린 시절 학대나 부정적인 경험으로 인해) 정신적,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그저 '정신병'환자나 '마음이 약해빠진'인간으로 취급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서적 흙수저'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고 포장하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내가 '정서적 흙수저'라고 스스로 인정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나보다 더 어려웠던 환경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튜브를 기반으로 하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그 속에서 정서적 흙수저이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했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각 분야에서 최정상급으로 성장한 리더들이 경제적, 정서적 흙수저였다고 고백하는 것은 나에게 큰 용기를 심어주었다. 내가 흙수저였던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계속 흙수저로 살 필요도, 흙수저로 취급받을 이유도 없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사실 나는 정서적 흙수저이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금수저도 아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바퀴벌레와 쥐가 득실거리는,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 주택에 셋방살이를 했으니 경제적 흙수저로 내 인생의 15년 정도를 보낸 셈이다. 물론 나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텨낸 흙수저 동지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지금까지 살아낸 고통의 세월에 깊은 위로와 공감을 보내고 싶다.
요즘은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서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에 이슈가 되는 일이 많다. 마치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돈이 많아도, 아이를 망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주는 사건들이 인기가 있는 것 같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하지만, 가족끼리 서로 애정이 넘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내가 처음으로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을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대학에서 만난 한 친구는 부모님이 두 분 다 오랫동안 암투병을 하셔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그 친구는 학자금을 벌기 위해 주말 알바는 물론이고 평일에도 밤늦게까지 알바를 해야 했지만,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가족끼리 서로 편들어주고, 뭐라도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내 눈에는 그 친구가 대학생이라기보다는 알바생으로 보였지만, 그 친구는 자주 웃었고 성적이 잘 나왔으며 인기가 많았다. 말 그대로 '정서적 금수저'였던 것이다.
스무 살의 나는 그 친구의 삶을 부정했던 것 같다. 매일 테이프형 트랩에 가득 붙어있는 바퀴벌레, 그리고 새벽에 화장실에 갔다가 발견했던 변기 안에서 유유히 수영하고 있던 회색 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제적 흙수저 상황은 매일 일어나는 부모님의 싸움과 확실히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말하는 삶이 뭔가 거짓이 있다고 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돈이 없어도 화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의 부모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란 말인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흙수저는 정서적일 수도, 경제적일 수도, 신체적일 수도, 심지어 지적(지식적) 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나는 경제적 흙수저이자 정서적 흙수저였다. 나와 동일하게 정서적, 경제적으로는 흙수저이지만, 신체적 우월함을 타고 난 연예인들의 이야기나, 보증을 잘 못서는 바람에 갑자기 집이 어려워졌지만 늘 책을 사주셨던 부모님이 있었다는 성공한 사업가의 이야기는 내가 모든 영역에서 흙수저라고 낙인을 찍는 듯했다.
경제적, 정서적, 신체적, 지적, 이 네 가지 영역 모두가 금수저이거나, 두 가지 이상 이거나, 적어도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노력으로 극복하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노력해야 하는 가?'에서 시작한 질문이 '왜 살아야 하는가?'까지 이어졌다. '죽고 싶다'라기보다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세상이 나에게 '뭘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 그냥 죽어.'라고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죽을 용기보다는 노력할 용기가 조금 더 컸는지, 어쨌든 그냥 열심히 살았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희망 같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찾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시간과 돈, 에너지를 막 쏟아부었다. 차츰 삶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전과 비교하면) 실제로 나아졌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이가 마흔이 되어갔다.
삶이 어느 정도 나아지는 듯 보일 때,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제적, 정서적으로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수저나 은수저 정도로 보는 것이 느껴졌다. 가끔 어떤 사람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신 거 같아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확실히 비꼬는 말투는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친해진 사람에게 나의 흙수저 생활에 대해 얘기하면, (놀라는 척이 아닌) 놀라는 경우가 꽤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사람들이 '흙수저로 태어나 금수저가 된 이야기'에 열렬히 호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돈이 없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시했는지, 얼마나 사랑받지 못했는지, 그리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변화가 드라마틱할수록 사람들은 더 열광한다. 사람들은 '반전'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맨부커상을 수상한 것도 엄청난 반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반전은 희망을 품고 있다. 지금 내 현실이 아무리 비참한 흙수저라도 동수저, 은수저, 더 나아가 금수저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 그것에 사람들은 마음을 뺏긴다.
나는 경제적, 정서적 흙수저로 태어났고 여전히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금수저가 되지는 못했다. 신체적, 지적인 영역도 금수저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동수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사는 공간에는 바퀴벌레도, 쥐도, 싸우는 부모도, 폭력도, 차압도 없다. 매력적이진 못해도 비호감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없고, 유식하진 못해도 일자무식이라는 소리도 안 듣고 산다. 이 정도면 (누구의 도움없이 나 스스로 노력해서 이룬) 동수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흙수저에서 동수저까지는 10년 넘게 걸렸지만, 성장에는 가속이 붙기에 은수저까지 가는데 5년, 또 금수저까지는 3년 정도가 걸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만약 내가 은수저가 되면 내 변화는 더욱 드라마틱해진다. 흙수저였던 과거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현재와 미래만 변한다. 변화가 클수록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좋아할 것이다. 만약에 금수저까지 될 수 있다면 내 이야기는 더더욱 드라마틱한 반전의 묘미가 있는, 흥미롭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된다.
반전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나눠주고, 그것은 우리에게 성취와 행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작은 것이라도 하나하나 이뤄가면 우리는 인기 있는 사람이 된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우리를 깊이 존중하고, 존경하며 우리에게 배우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금수저는 절대 가질 수 없지만, 흙수저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