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먼 당신
철커덩 소리와 함께 지하철문이 열린다. 차가운 철제 기둥에 기대어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진다. 이윽고 나의 또 다른 아버지가 지하철에 오른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흰색 페인트가 한가득 튄 검은 작업화. 통풍이 잘 되는 통 넓은 바지, 꽤 오랜 시간 함께 한 듯한 체크우늬 셔츠. 두툼한 가방을 매고 풀 힘도 없는지 의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옆자리 승객의 미간에 주름이 진다. 수북히 풍겨오는 땀냄새에 그럴 만도. 반대편에 앉은 나에게 뭉근하게 퍼져오는 그 냄새는 100km 떨어져있는 나의 아버지를 불러온다. 바다와 동업하는 그는 해질녘 집에 돌아와 찐한 바다내음과 땀냄새를 풍기며 마루에 걸터 앉아 말했다.
" 이게 돈냄새다. "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아버지는 비닐봉지 몇개를 발언저리에 놓고 세상의 소음을 차단 시킨 채 모든 감각을 놓았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 눈빛보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눈은 의식 너머 어딘가를 헤매는것 같았다. 이윽고 도착한 목적지에,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킨 그는 비닐봉지를 양손에 쥐고 내렸다. 비닐봉지 안에는 반으로 자른 수박이 들어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수박을 나눠먹을 가족일 수도 있고, 어두운 정적일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바라는건 그 수박이 참 달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이든, 혼자이든 하루 끝의 짧은 조각은 그에게 시원함을 선사했으면 좋겠다. 어린 나는 그 냄새에 코를 싸매쥐고 자리를 떴지만, 그의 저녁은 시원하고 달콤했으면 좋겠다.
지하철 몇 정거장 지나는 사이 잠깐 마주한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을 부표처럼 떠돌았다. 뭉근하게 풍겨오던 땀냄새, 고단해보이는 얼굴이 나의 아버지의 그것과 꽤 닮아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어릴 때는 무서워서, 다 커서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자꾸 부딪쳐서 가깝고도 먼 당신. 무뚝뚝한 딸은 오늘도 돌아서서 뱉은 말을 후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