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를 읽고

사계절의 내음이 나는 책

by 글 쓰는 변호사

백수린 작가의 책 중 가장 먼저 읽은 것은 봄밤의 모든 것.


그 책 역시 좋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한 적도 있다.


두 번째의 책은,

지금 계절이 늦여름인지라 더욱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여름의 빌라'라는 단편 소설집이다.


표지는 제목처럼 여름 향기를 물씬 머금고 있지만

실은 사계절의 내음을 모두 품고 있는 글이 실려있었다.


백수린 작가의 문장은 지나치게 아름답거나 어렵지 않지만

간직하고 싶을 만큼 우아하고 단단하며

그래서 여기, 몇 문장이나마 기록해 본다.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의 밤을 기억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습기였다. 세 달 남짓한 여름밤을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곧이라도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대기가 얇고 부드러운 껍질처럼 우리를 감쌌고, 나는 그 안에서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 시간의 궤적


'같은 장소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을 당긴 것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그 이후 함께한 날들 동안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 여름의 빌라


'그렇게 일찍 집에 돌아와 봤자 혼자 있게 되는 날들에는 처음 이사 왔던 날 아버지가 내게 아파트 단지를 보여주었던 옥상에 쭈그려 앉아, 사라져 가는 태양의 빛줄기가 쇠락한 골목과 남루한 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그러면 그 손길을 따라, 동네는 쪽잠을 청하는 고단한 노인처럼 주름이 깊게 팬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해가지고 나면 대기에 남아 있던 온기도 노인의 마지막 숨결처럼 느리게 흩어져갔다 초라한 골목이 어째서 해가 지기 직전의 그 잠시 동안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지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 깃드는 적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달콤하고 또 괴로워 울고 싶었을 뿐.'


- 고요한 사건


'그는 틀림없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어봤겠지?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그렇게 말하자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기쁨이 동시에 그녀 안에 차올랐다. 그 순간, 그들의 삶의 각도가 미세하게 어긋났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었으므로 그저 첫째 아이가 내미는 컵을 받아 쥐었다. 한순간이지만 엄마가 자신을 완벽히 잊을 수 있음을 알아버려 한나절만에 조숙해진 둘째 아이만이 엄마의 평상시와 다른 아름다움이 낯설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여고생 난실은 달랐다. 그녀가 갈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뭔가 특별한 것, 고양시켜 주는 것, 그녀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 줄 그 무언가. 밤마다 그녀를 불면으로 이끌었던 것은 윤심덕과 김우진, 슈만과 클라라 같은 연인들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놀라운 사건들이 가득할 거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고, 자신에겐 인생을 하나의 특별한 서사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이런 겨울 오후에, 각설탕을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리면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각설탕 탑을 쌓는 일에 아이처럼 열중하는 늙은 남자의 정수리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어른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할머니는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 흑설탕 캔디


'논밭을 가로질러 바람이 불어오면, 창가의 커튼이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다줄 수 있는 범선의 돛처럼 부풀던 교실. 지금의 나는 아직 늙진 않았지만 더 이상 젊지만도 않다. 나는 무엇이든 선택을 할 때면 그 대가로 미래를 지불해야 하는 줄 몰랐던 날들이 이미 가마득히 멀어졌음을 안다.'


-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나 역시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예전에는 단편 소설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단편적인 이야기가 실은 내 삶을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된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라고 칭해주고,

사랑을 독려해 주는 백수린 작가의 책을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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