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춧가루는 예로부터 좋은 폭탄이었다
"...넌 요리를 하랬더니 왜 폭탄을 만드는 거야?"
후춧가루가 가득한 곰탕을 한입 크게 뜬 자람 언니가 켁켁거렸다. 보아하니 사레가 제대로 들린 모양이었다. 분명 어제 기침은 멈췄다고 했으니… 이걸 먹고 아픈 게 도지지는 않았을 텐데.
"됐고, 이보람. 휴지 좀 줘봐."
언니는 코를 훌쩍이더니 갓 뜯은 화장지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고는 대뜸 기침인지 재채기인지 모를 것을 시작했다. 이거 기침 아닌 것 맞지. 그냥 간지러워서 재채기하는 거지?
괜히 나 때문에 언니가 더 아파진 건 아닌가. 기관지 말고 마음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이 정체불명의 '곰탕'을 끓여줬으니 기분 나쁠 법도 하다.
그래, 언니 말대로 그냥 레토르트 식품 사다가 데우기만 하면 되는데. 곰탕이 너무 밍밍하길래, 언니를 위해 간을 맞춰준다는 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잠깐만. 정신 차려 이보람. 또 '내 탓이오'를 시전하며 마음 아파할 작정이야? 가끔은 남 탓도 해야 한다고.
그래, 되짚어보면 언니 때문이야. 간 맞추기 귀찮다고 소금과 후추를 섞어서 넣어둔 건 애초에 이자람이었다고. 고작 1분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가 동생이 된 것도 서러운데, 이젠 언니라는 호칭도 안 붙이고 그냥 '이자람'이라고만 부를 거다.
아.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나? 아무렴 어때. 언니가 재채기하는 틈을 타서…
"야. 무슨 생각해?"
진작에 재채기를 다 끝낸 모양이었다. 분명 언니는 내가 우물쭈물하면 짜증낼 것이다. 태생부터 자매는 싸우며 자란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생각나는 대로 빨리 대답하는 게 갈등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일 터. 하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야 해. "응, 언니가 매우 짜증난다는 생각. 내가 요리 못하는 건 죄가 아니잖아."라고? 나도 안다. 분명 이 말을 꺼내면 집안이 뒤집어질 것이다. 자람 언니, 미안해. 생각나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나 심심하단 말야. 요새 아파서 학교도 못 나가다 보니."
맞다, 언니는 집돌이 집순이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동아리 모임에 갔는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어" 같은 이야기?
듣기만 해도 시시할 테니까 적당히 살을 붙여야겠다. 말수가 적지만 일단 입을 떼면 청산유수처럼 할 말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 이게 내 유일한 재능이다.
잠깐만. 굳이 살을 붙일 필요가 없겠는데. 동아리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참이슬이 맛있네, 처음처럼이 맛있네' 하고 열띤 토론을 벌일 때 조금 떨어진 구석에 앉아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고독을 즐기는 것 같아서 이름은 차마 물어보지 못했지만.
이자람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그리 만족스러운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내가 프로 이야기꾼은 아니었으니까… 뭐가 됐건 이야기는 하는 사람 마음이지 않은가. 말하는 사람이 행복하면 그만이지. 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 천천히 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번에 문학 동아리 가입했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그때 언니가 이랬잖아. 글이라고는 일기밖에 안 쓰던 네가 무슨 문학이냐고."
"응. 그래서?"
역시나 언니는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정말 심심한 게 맞았나 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람. 더 얘기해봐."
"어제였나 그제였나, 첫 모임? 개강파티? 뭐 그런 게 있었단 말야. 말만 개강파티지 사실 술파티였지만."
"그렇지. 넌 또 조퇴했겠구나."
"뭐… 반쯤은 맞는 말이야. 통금 있다고 하고 나갔으니까."
"너답다, 참."
할 말이 없었다. 우리 집에 통금 같은 게 없었던 건 사실이니까. 애초에 나랑 언니만 같이 사는 집인데 규칙이 있기는 뭐가 있겠는가.
아, 문학 동아리라길래 뭔가 대단하고 심오한 대화가 오가려나 기대했는데 김이 샌 것도 사실이다. 막상 하는 거라고는 ‘어떤 술이 더 맛있냐’, ‘내 연애사는 이런데 네 연애는 어떻냐’ 등등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 이보람. 이래 보여도 지루한 건 못 참는 성격이란 말이다. 꼭 이런 것만 자람 언니와 닮았지…? 뭐, 아무튼. 그런 건 둘째치고.
“그런데 나, 거기서 신기한 분을 뵀던 것 같아.”
“어떤 사람?”
“다들 술 마실 때 구석에 혼자 앉아서 웃고 있었어.”
언니가 잠깐 침묵하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떻게 웃었길래. 방실방실? 킥킥대면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를 봤다는 것처럼 얘기한다?”
“난 또. 도대체 어쨌다는 거야?”
나왔다, 저 짜증 섞인 말….
“그냥 빙그레 웃고 있었다, 왜. 됐지?”
그제서야 언니는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이자람은 아픈 것만으로도 서러울 텐데. 착한 동생이 봐줘야지.
“그래서, 그래서. 더 알아낸 건 없어?”
“응, 아직 없어.”
“뭐야. 시시하게.”
“내가 언니처럼 아무한테나 말 걸고 친해지는 성격은 아니라서.”
“야, 이보람! 말 똑바로 해!”
그래, 그 반응이야. 역시 이자람은 회복이 빠르다. 누구 언니 아니랄까 봐.
“그 의미에서 언니, 난 마라탕 먹을까 하는데. 언니도 좀 줄까?”
“마라탕? 진심이야? 당장 줘… 부탁이야.”
“언니는 환자잖아. 매운 건 기관지에 안 좋아.”
“야. 그럼 그 후추 한가득 들어간 곰탕은 뭔데!”
“그거야 내가 실수한 거고.”
시뻘게진 자람 언니 얼굴이 볼 만했다. 누가 보면 ‘열이라도 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래도 마라탕 덕분에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다. 난 역시 최고의 동생이야. 아, 침실로 들어가는 언니 발소리가 좀 컸는데. 별일 없겠지?
그나저나 그 동아리 사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고민이다. 생각해보면 문학 동아리에 들어간 이유도 딱히 없는데. ‘열흘치 일기를 한 번에 지어냈던 경험을 어떻게든 살려서 소설이라도 써볼까?’와 ‘맨날 언니랑 붙어다니기도 지겨우니까 사람 좀 사귀어보자’가 핵심 동기였다. 그게 다다.
아무튼 다음에 만나면 인사라도 해볼까. 그때까지 내가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이 언제일지는 의문이지만.
그건 그렇고 마라탕부터 시켜야지. 분명 배달이 오면 언니는 ‘제발 한 입만’이라고 애원하며 나에게 달라붙을 것이다. 뭐, 그래. 자매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랬으니까. 한 숟가락 사라져도 손해 볼 건 없겠지. 그 뒤에 언니가 재채기하면…. 등을 두드려주면 그만이다.
배달 앱을 실행해 손가락을 내렸다. 세상엔 먹을 게 많고도 많아서 볼 때마다 행복한 고민에 빠져든다. 언니가 깨기 전에 마라탕이 도착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