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 이야기

이슬, 참이슬, 아침 이슬

by Nope

모두가 뻗은 동아리방 풍경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살짝 열린 창에선 외풍이 솔솔 들어왔고 초록색 유리병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슬쩍 핸드폰을 보니 5시 30분. 이슬이 내리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마침 캠퍼스도 넓겠다, 옷이나 챙겨입고 산책이나 가볼까. 평소에 아침잠이 많던 내가 이렇게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게 될 줄이야.

사람들 좀 만나려고 들어온 문학 동아리에서 가진 술자리. 심오한 문학적 담론이 오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화두는 '참이슬이 낫네, 처음처럼이 낫네' 등등이었다. 소소한 주제로 논쟁하던 동아리 사람들을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비웃으려던 건 아니다. 그냥 생각만큼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서. 적적하기 짝이 없었던 아웃사이더 인생의 끝을 알리는 듯했다.

새벽녘 차가운 공기를 마시니 옛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어딜 가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겉돌기만 했다. 현장학습이든, 수학여행이건, 아니면 시험 끝난 다음날이건, 시끌벅적한 무리에서 한 걸음 떨어져 고독을 즐기는 편에 가까웠다. 아니, 고독을 ‘즐겼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한테도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뭐가 됐건 확실한 점은, 나와 또래 무리가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는 사실이다. 나라고 해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은 욕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책을 벗삼아 살아온 세월이 본의 아니게 길어지다 보니… 자동으로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었을 뿐이다.

안 그래 보일지 몰라도 나, 은근히 외로움을 많이 탄다. 책이 얼마나 재밌는지 주변에 설파하려고 해도 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했단 말이다. 책보다는 유튜브, 유튜브보다는 릴스와 쇼츠가 더 인기가 많아진 세상이다 보니 그러려니 하지만.

잠깐만. 못 이기는 척 받아마신 알코올 몇 잔 때문에 머리가 아파온다. 어쩌면 생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선 이어폰을 꺼낸다.

글만큼이나 좋아하는 게 음악이다. 생각의 늪에서 잠시 빠져나올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면 정말로 세상에 나와 멜로디만 남겨진 기분이 든다. 충만한 외로움. 그리고 아련한 청량함. 아무도 없는 캠퍼스에 어울리는 선곡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내 외로움에 대해? 아, 사실 대단한 의미는 아니다. 그냥 어제의 난 이랬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와 조금 달라질 것 같다는 가벼운 이야기이다.

술에서 깨지 못했기 때문인지 단어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 문장이 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말들. 이럴 때는 누군가가 내 뇌를 낱낱이 분해해서 그 속의 생각을 꺼내 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복잡한 기계의 뚜껑을 열어 들여다볼 때처럼, 그렇게.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겠다고? 미안하다. 나도 정신이 없어서. 조리 있게 말하는 법을 익히고 싶은데 어렵다. 새벽 이슬을 맞은 풀처럼 확실히 정신을 차린다면 나도 좋고 듣는 당신도 좋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누가 내 머리 위로 이슬을 안 적셔주나?

잠이 아직 덜 깼나 보다, 나. 아직 미라클 모닝은 먼 것 같다. 방금도 계단참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아침잠이 중요하다고 하는구나. 지금도 머리가 띵하다. 동아리방에 돌아가서 잠이나 잘까 심히 고민된다. 더 중요한 건 해장 같지만 그건 둘째치고.

아닌가, 이왕 나온 김에 한 바퀴 돌고 들어가는 게 나으려나. 애매하게 있다가 가는 것보단 그게 좋겠지….
동아리 사람들이 깨어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고독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언덕 없는 캠퍼스를 구석구석 거닐면서.

그나저나 해가 참 짧다, 이 계절은. 점점 해가 길어질 거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공기에 푸른 기가 도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어폰 볼륨을 최대로 높이고 흥얼거린다. 부디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바라면서. 나처럼 아침 산책을 나온 누군가나 조깅하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면 심히 민망한 광경이 연출될 것이다.

그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걸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마침 아침 산책을 나온 듯한 사람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해가 아직 안 떠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기 망정이지, 내 머리 뒤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면-

아, 망했다. 때마침 눈앞의 하늘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그 바람에 '누군가'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인사를 한 것 같은데 흐릿한… 하지만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빨랐다.

“혹시… 문학 동아리 재경님?”

이걸 맞다고 해야 돼, 아니라고 해야 해!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는 걸 분명 상대방도 봐버렸을 것이다. 방금 음정도 박자도 안 맞추고 신나게 샤우팅 중이었는데. 글렀다….

하지만 상대방은 이미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답할 수밖에 없잖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네. 혹시 성함이…”
“같은 동아리 서이수라고 해요.”

으아아악. 이런 상황에서 대화라니. 나한테 너무 큰 시련이다. 도대체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해. 다들 기절했는데 나만 깨서 산책 나왔다고? 아니면 노래 듣다가 너무 좋아서 따라 부르는 중이었다고? 설마… 둘 다라고?

아무래도 첫 번째 대답이 제일 무난하겠지. 그래서 그대로 했다. 다행히 상대방, 아니 이수님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시는 눈치였다. 휴.

“산책 좋아하시나 봐요. 종종 같이 해요.”

내가 누군 줄 알고 그 말이 바로 튀어나오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억지로 찍어눌렀다. 굳이 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수님도 기분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그럼 약속한 거예요?”
“네… 물론…이죠.”

순식간이었다. 이수님이 내 옆에 나란히 붙더니 발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대체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해. 몽롱했던 것이 확 깨지는 기분을 난생처음으로 느껴본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떠올라 아침이 찾아왔다. 맺혔던 이슬이 마를 시각이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 한 명이었던 산책하는 사람도 둘로 늘었다. 이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대충 ‘아무것도요’로 얼버무린다. 이수님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나까지 기분이 붕붕 뜬다. 술 때문은 아니고… 아, 모르겠다.

이어폰을 빼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폐가 상쾌해지는 것 같다. 대화가 시작되기 전의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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