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 이야기 #3

속눈썹

by Nope

“뷰러도 안 돼, 마스카라도 번져. 도대체 되는 게 뭐야?”

거울을 노려보았다. 속눈썹이 축축 처진 여자가 비쳤다. 클렌징티슈를 뽑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 쓴 클렌징티슈는 이미 한 움큼이나 쌓여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속눈썹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이었다. 물론 결과는 보다시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옷장 문에 걸린, 얼룩 한 점 없는 하얀 원피스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랬다가는 정말로 약속에 늦고 말 것이다.

저번에 우연히 만난 그 남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연히 부딪혔다는 게 맞겠지. 약속에 늦어서 급하게 뛰어나가다가 정면충돌한 게 화근이었다.

다행히 무릎이 살짝 까지는 선에서 그쳤지만, 문제는 흰 치맛자락에 붉은 얼룩이 졌다는 것. 그걸 본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더니 다짜고짜 나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소설도 아니고 현실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다니 의아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중에는 그 기분을 즐기고 있었던 걸!

약속 장소까지 날 데려다준 남자는 세탁비를 주겠다고 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첫 남자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쉽게 보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사과는 돈으로 받지 않고 직접 만나서 받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남자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좋아, 이 만남을 빌미로 썸이 되고 사랑이 되는 거야. 기나긴 솔로 인생도 이제 끝이라고! 나, 박서연의 생존 철칙 1호, ‘주워들은 말은 가슴에 새겨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거울에 비친 속눈썹을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찰하고 있었다. 말했듯이 뷰러는 고사하고 마스카라마저도 먹히지 않는다. 태생이 곰손이라 속눈썹 붙이기는 꿈도 못 꿔, 속눈썹 펌은 죄다 예약 마감이야. 어떡해야 할지 하나도 감이 안 잡힌다. 이런 몰골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고.

머리를 쥐어뜯으려다가 단정하게 편 게 생각나서 그만뒀다. 이게 얼마짜리 매직인데 다시 부스스하게 만들어버릴 수는 없지. 더 늦기 전에 준비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건 안다. 것도 아주 잘. 하지만….

그 남자 이름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그날 물어본다는 걸 깜빡한 탓이었다. 글렀네. 남자가 기억력이 좋기를 빌 수밖에 없다. 그때 입었던 하얀 원피스가 제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잠깐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속눈썹도 못 처리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그냥 이대로 나가, 아니면 더 손을 대봐?

고민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답은…. ‘포기’. 속눈썹이 처지든 말든 별 일이 있겠어? 마스카라 범벅이 돼서 판다 눈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가뜩이나 원피스도 흰색이라서 번지면 큰일이다.

좋아, 준비는 거의 완료. 그런데 신발은 어쩌지? 운동화? 샌들? 이 날씨에 구두는 너무 가혹하잖아. 키는 커 보이고 싶은데, 또 발목이 꺾이면 큰일이란 말이지. 또 못 걷겠다고 업히면 괜히 민망한 상황만 연출된다고.

순간 알람 소리가 크게 울렸다. 신발장 앞에서 서성이지 말라는 신호 같았다. 발은 깔끔하게 씻었으니 대충 신고 나가라고.

맞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보고 대화하지 발을 보고 대화하냐? 오늘을 위해 골라둔 샌들을 신고 엘리베이터로 걸어나왔다. 마침 타는 사람도 없어서 1층까지 쭉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런데….

와, 이건 또 뭐냐. 하필 나가자마자 비가 쏟아지다니. 택시라도 잡아야 하나? 아니면 우산이라도 들고 나와야 하나. 원래 사랑은 비를 타고 내린다고 하지. 그러니까 우산 하나를 들고 가서 그 남자랑 나눠 쓰면…. 오케이. 만사형통이다. 다 해결이야!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선 순간, 나보다 훨씬 키가 큰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워낙 급하게 돌아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서연 씨. 비 많이 올 것 같아서요. 오늘 만나기로 한 거 괜찮겠어요?”

…뭐지. 우리 집 앞까지 찾아올 사람이 있나?
아니, 잠깐만. 코드 블랙 발령. 이건 비상사태다.
그 남자다.

이걸 어떡해야 해. ‘사랑은 비를 타고 쏟아지니 괜찮다’를 연발해야 해, 아니면- 기껏 세탁한 하얀 원피스가 혹시라도 딱 내 근처를 지나갈지 모를 차 때문에 흙탕물을 맞아서 얼룩덜룩해지는 꼴을 보고 있어야 해!

그래, 여자는 직진하는 법. 직진하는 법인데…. 모르겠다. 나 박서연의 생존 철칙 2호. 한번 손에 넣은 기회는 놓치지 않…긴 개뿔. 이건 기회가 아니라 위기다!

“네, 다음에 봬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따발총 쏘듯이 외친 다음에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아하하… 하나도 안 아파요. 저 아주 멀쩡해요!”

안 멀쩡한 거 보이죠? 제발 이 대화 좀 끝내주세요. 세상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현관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더니…….

첨벙 하는 소리가 아주 크게 났다.
요새 장마철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서연 씨!”

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네. 원피스 자락도 봐. 원래 하얀색이었는데 어느새 예쁜 베이지색이 되었어….

이래서 어른들이 비 오는 날 샌들 신는 거 아니랬구나. 잽싸게 달려와 날 안아서 들어올리려는 남자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저 걸을 수 있어요. 이번엔 하나도 안 다쳤다고요.

“하지만…”
“저 진짜 괜찮아요! 이번에야말로 진짜 세탁비 주시는 거 어때요?”
“그거야 당연히-”
“돈으로 말고요, 전화번호로요.”

아, 망했다. 방금 건 너무 오글거렸잖아! 박서연, 도대체 어떤 배짱으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 알려드리면 되죠? 핸드폰 갖고 계신가요?”
“네, 당연히…”

화면에서 떨어지는 물을 원피스 자락으로 대충 닦고 남자에게 건넸다. 핸드폰이 방수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어 봐.

남자는 키패드를 수십 번은 눌러본 듯한 솜씨로 번호를 찍어서 건넸다.

“혹시 성함이?”
“비밀이에요.”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담…. 뭐 어때, 두 번이나 날 구해줬으니까. 그 정도면 됐지.

“그래서 서연 씨, 오늘은 진짜 괜찮으신 거죠?”
“네… 아무래도 옷을 제대로 버렸으니까…. 나갈 기운이 안 나긴 하네요.”
“그래요. 다음에 봬요.”

남자가 선선히 손을 흔들었다. 나도 대충 손을 들었다.
모태솔로 박서연. 이렇게 첫 연애를 날려버리는 건가….

아니. 이대로 굴할 내가 아니다. 번호도 얻었겠다, 들어가서 메시지를 남기는 거다. 할 수 있다, 나!

메신저 앱에 들어가 새로고침하니 역시나 빨간 점이 떴다. 이름도 없이 선글라스 하나만 있는 프로필. 그 남자가 맞기를 바라며 키패드에 손을 올렸다.

‘비도 오는데 조심히 들어가세요.’

메시지 옆의 1은… 생각보다 금방 사라졌다.
커다란 오케이 이모티콘. 그리고 깔끔한 답장.

‘조심히 들어가세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가슴이 뛰는지.

아… 그래도 박서연, 해냈다. 봐봐. 할 수 있잖아!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고 벌렁 드러누웠다. 어차피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거 샤워는 천천히 하면 그만이었다.뜨거운 물로 씻으면 좀 나아지려나?

옷장에 걸어둔 원피스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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