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행운의 요정
“어때, 서연! 나 요정 같지 않아?”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도는 여자. 다름 아닌 내 친구 하늘이다. 자고로 진짜 친구라면, 친구가 환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자각하지 못할 때 도와줘야 하는 법.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나도.”
하늘이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더니 내 앞에서 흔들었다. 형형한 눈빛에서 살기까지 느껴졌다.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분명 지금은 여름일 텐데. 뭐 어때,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나으니….
다행히 하늘이는 금방 기운을 차렸다. 옷걸이 틈새로 사라지더니 입지도 못할 옷을 한가득 꺼내 왔으니까. 피팅룸 문에 주렁주렁 걸린 옷을 보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실감이 났다. 쇼핑 중독자 문하늘에게 끌려와서 황금 같은 주말을 낭비하고 있었지.
옷이야 계절에 잘 맞고 사이즈가 괜찮으면 그만인데 뭐 이렇게 성화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늘이 말로는 자기 이름처럼 하늘하늘하고 청순한 옷을 입는 것이 남심을 사로잡는 지름길이랬다. 그래서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 박서연의 생존 철칙 2호. ‘한번 손에 넣은 기회는 놓치지 않는다’를 실천할 타이밍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요정이라. 문하늘에게 요정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나? 하늘이는 책에서 본 장난꾸러기 요정 같다. 성격이 불같은 데다가 흥이 많고 몸집이 자그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하늘이 말한 요정은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뭐 그런 이미지일 것이다. 눈을 씻고 봐도 하늘이한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소들이었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나도 안다. 하지만 이해해주시길. 내가 워낙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라서.
그래도 하늘이에게 진 빚은 있다. 문하늘이 아니었다면 그 하얀색 원피스도 집에 들여놓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옷장에는 온통 츄리닝, 맨투맨, 후드티, 티셔츠만 한가득이었으니. 그때 그 남자가 날 업고 달린 건 순전히 내가 원피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이 기울고 있다.
아, 따져보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남자 전화번호도 받아놨었는데. 이름을 끝까지 안 알려준 걸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넘어진 사람을 업고 달린다’는 면부터 특이하긴 했으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심심한데 그 남자에게 연락이나 해볼까. 조용히 메신저 앱을 실행했다.
역시나 ‘조심히 들어가세요’를 마지막으로 멈춘 대화. 기껏 남자와 단둘이서 이야기할 기회를 잡았더니만, 인사말 따위로 낭비하냐? 여기서 그만두면 박서연이 아니다.
키패드 위에 손을 올리고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생각했다. 밥을 먹자고 할까, 아니면 영화 좋아하냐고 물어볼까. 쇼핑 좋아하는 사람 흉내라도 내볼까? 하지만 다 구렸다. 기껏 편 머리카락을 또 쥐어뜯고 싶어질 정도였다. 손이 떨려서 도저히 타자를 칠 수가 없는 상황. 어떡하면 좋지?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문하늘이 서 있었다. 하긴, 그 남자가 SPA 매장에 오긴 왜 와. 딱 봐도 단벌신사 같았는데. 애초에 기대하지 말았어야지….
“박서연. 왜 이렇게 표정이 썩었어? 정신 차려.”
하늘이는 왜 요즘 옷들은 예쁜 게 없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사람들이 SPA 매장에 오는지 모르겠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영혼 없이 맞장구를 치며 하늘이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래, 너한테 어울리는 건 청순한 요정이 아니라 말 많은 꼬마 요정이라니까. 사람 혼을 빼놓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어, 넌….
“너, 왜 옷 안 골랐냐고 묻고 싶은 거지? 안 그래도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더 쇼핑하면 힘들어할까 봐 한 방에 다 사기로 했지. 오케이?”
고를 게 없다던 사람은 어디 가고? 하지만 이내 수긍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물건을 질러대야 내가 아는 쇼핑 중독자 문하늘이지.
계산대 옆에 슬쩍 서서 하늘이와 점원을 기다렸다. 얼핏 여섯 자리 숫자가 들린 것 같다. 쇼핑백 가격까지 합치면 대체 얼마야. 뭐, 하늘이 본인만 행복하면 된 건가…?
“아무튼 그래서 박서연, 그 남자랑은 어떻게 됐어?”
쇼핑을 마치고 나오던 문하늘이 대뜸 내 팔짱을 끼고 물었다. 이런 오지랖이야 언제든지 환영이다. 20년 넘게 솔로였던 나와 달리 하늘이는 엄청난 연애 고수였다.
덕분에 쓸 만한 조언도 많이 들었다. ‘사람을 붙잡고 싶으면 어떻게든 빌미를 만들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처는 알아내야 한다’ 등등.
그래, 하늘이는 모태솔로인 내게 내려온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 그게 썩은 동아줄인지 어쩐지는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문하늘’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말을 해줄 건 틀림없었다.
하늘이가 나를 재촉하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안 그래도 생각 정리 중이었는데. 저번 약속날이 하필 비 오는 날이었어서 제대로 파투가 났다, 어떻게든 그와 다시 약속을 잡고 싶은데 키패드에 손이 도저히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을 간신히 입 밖으로 꺼냈다.
하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한번 툭 칠 뿐이었다. 얼떨떨해 제자리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서연. 뭐해? 일단 한번 질러봐.”
“길 한복판에서 핸드폰을 하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 반응을 다 쳐다볼 거 아냐.”
“그만큼 떨려? 박서연 너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라니까. 한번 해보고, 아니면 말아.”
하지만 도무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타자 치는 법마저도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뭐 잘못 먹은 거 아니냐며 나를 노려보는 문하늘 때문에.
“진짜 답답해서 못 봐주겠다.”
순식간이었다. 하늘이가 내 휴대폰을 낚아채 키패드를 두들긴 건.
그리고 보고 말았다. 화면을.
의기양양하게 휴대폰을 돌려준 하늘이를 쏘아보고 싶어졌다.
‘내일 시간 되나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문하늘답지 않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멘트라니. 내 사랑은 글렀다. 다 문하늘 때문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이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말들을 간신히 찍어눌렀다.
그 순간. 제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