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혹은 창작의 고통
“자, 자, 잠깐만요.”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들쳐메고 질주했다. 허공에 늘어진 다리가 맥없이 버둥거렸다. 뭐야, 이 상황. 아까 못 걸을 것 같다고 한 건 엄살이었는데. 설마 그걸 진담으로 받아들인 거야?
뭐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를 업고 달려가는 남자가 헉헉대는 소리에 맞추어.
흰 원피스 자락에 새빨간 얼룩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흠칫하던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고작 무릎만 까졌을 뿐인데. 민망함에 내 얼굴까지도 달아올랐다. 남은 힘을 한껏 끌어모아 외쳤다.
“잠깐만요!”
빨간 불을 무시하고 달려가는 소방차처럼 달음박질하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그 반동으로 몸이 크게 흔들렸다. 남자는 연신 죄송하다, 무슨 일이냐고 말하며 나를 더 꽉 업었다. 그 바람에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치맛자락에 묻은 핏자국보다 지금 내 얼굴이 더 빨갛지 않을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남자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간신히 우물거렸다.
“걸을 수 있어요.”
“뭐라고요?”
“저… 걸을 수 있다고요!”
앞만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갈색이 도는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구릿빛이라 해야 할지, 초콜릿 색깔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아주 예쁜 색깔을 띠고 있었다.
남자는 뭐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아주 천천히, 거북이 걸음걸이보다 더 느리게. 과연 입모양을 읽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순간, 눈앞의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다. 남자가 어느새 나를 업고 횡단보도까지 달려온 모양이었다. 다시 달릴 채비를 하는 남자에게 외쳤다.
“아까 뭐라고 하려고 한 거예요?”
“아….”
남자가 머뭇대자 한 차례 더 재촉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그게 다였다.
“일단 횡단보도부터 건너고 알려드릴게요!”
주변에서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것 같았다. 백주대낮에 원피스를 입고 생판 모르는 남자 등에 업힌 여자랑 그녀를 업고 달리는 남자라니. 누가 봐도 수상한 조합이었다. 그래, 이상하다는 눈으로 봐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남자가 숨을 거세게 몰아쉬며 달렸다. 그 와중에 내가 떨어지지 않게 종아리를 꽉 잡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수 있다니. 솔로 인생 23년이었던 나에게도 봄이 오는 걸까? 이건 단순한 호의일까, 아니면 호감일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물결치듯 지나갔다.
하지만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 사람이 특이한 사람이든 말든,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만큼은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가 어쩌다가 만났더라. 그래, 약속에 늦어서 새로 산 흰 원피스를 입고 미친 듯이 달리다가 그 남자랑 부딪혔지. 운도 지지리 없지, 뒤로 넘어졌는데 무릎이 깨져서….
회상은 여기까지. 다시 현재로 돌아오자. 얼굴만 알고 이름을 모르는 남자가 나를 업은 채 달려가고 있다. 그곳이 어디일지는 모른다. 내가 말한 약속 장소일지, 아니면 병원일지. 무릎이 깨졌는데 병원까지 가는 건 너무 과하다 싶긴 하지만.
그래도 뭐 어때. 어느새 나는 신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첫 고백, 첫 데이트, 첫…. 그나마 남아 있던 아픔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난…
*
“…너무 뻔해. 뻔하다고!”
키보드 백스페이스를 꽉 눌렀다. 방금 전까지 의미 없이 채워졌던 하얀 글자가 지워지고 검은 바탕만 남았다.
왜 ‘흰 바탕에 검은 글자’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이유를 알려줄까 한다. 백지, 아니 흰 공간만 보면 채우고 싶은 욕구 대신 버리고 싶은 마음만 생겨서였다.
그래서 핸드폰 메모장이고 컴퓨터고 할 것 없이 다크 모드를 쓰기 시작했다. 문제는 라이트 모드를 쓰냐 다크 모드를 쓰냐가 아니라, 다른 데 있다는 거였지만….
배경이 새까맣든 새하얗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커서만 반짝거리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자동으로 머릿속이 텅텅 비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카페인, 음악, 장소 바꾸기 등등을 총동원해 공간을 채우려고 했다. 무의미한 것을 뱉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서기 위해, 새벽이 오도록 잠들지 못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글쟁이로 살아가기로 한 이상 무언가를 토해내야만 했다. 그게 창작의 고통이자 작품을 탄생시키는 자의 숙명인 법. 맛있고 예쁜 표현이, 술술 읽히는 문장이 넘쳐나는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있는 게 진지한 고찰일까.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미 글쓰기를 심도 있게 바라보는 사람,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묵직한 글을 적는 사람은 세상에 넘쳐난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한없이 가벼울 뿐. 그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글인데 벌써 아이디어 고갈이라니. 나는 뻔한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걸까….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이미 글을 쓰기 시작한 이상 뭐라도 적어야 했다. 텅 빈 화면을 노려보다가 되돌리기를 눌렀다. 의미 없는 글자가 다시 공간을 하얗게 채웠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그래, 주인공이 남자의 등에 업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순간. 거기까지 썼지….
*
“서연 씨, 무슨 생각해요?”
순간 들려온 목소리가 생각을 끊어버렸다. 내가 너무 오랜 시간 말이 없어서 심심했던 걸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번화가. 그것도 한적한 골목. 약속 시간에는 늦어버렸지만 그거야 뭐… 잘 이야기하면 되니까.
남자가 천천히 나를 내려주었다. 업혀 있다가 땅을 밟은 바람에 몸이 흔들렸다. 휘청이는 날 잡는 손이 따뜻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
제자리에서 깜빡거리는 커서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뭐를 더 쓰면 좋을까. 내가 서연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한가하게 주변 풍경을 묘사할까, 아니면….
에라, 모르겠다! 옆에 있던 보온병을 들어 커피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어느새 절반 정도 찬 화면을 노려보면서.
나는 카페인을 흡수하면 비워낼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나는 글을… 비워내기 위해 썼지. 좋았어, 이건 청신호야. 힘내자 나!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타자를 친다. 옆에서 보면 게임을 하거나 키보드 배틀을 한다고 느껴질 만큼. 수습은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해주겠지.
그렇게 오늘도 글쓰기가 주는 황홀경에 빠져든다. 아니, 카페인인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확실한 건….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발만큼은 멈추지 않는다는 점. 이 순간만큼은 난 자유롭다. 누구보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