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 이야기 #2

모래도 흙이긴 흙이니까

by Nope

“그래, 사주에 토가 부족하구먼.”
생년월일시를 들은 술사가 대뜸 내뱉은 말.

“자네가 일이 안 풀리는 건 발을 디딘 땅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인데, 모래시계나 식물을 곁에 두면 어떻겠는가?”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모래랑 흙인데요…라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20년 넘도록 솔로였던 데다가 학점도 거하게 말아먹고 취업은 꿈도 못 꾸던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이긴 하겠냐마는.

흙먼지가 콧속으로 파고드는 기분과 양말 틈새로 까끌한 모래가 스며드는 감촉을 참을 수 없어서 남들이 다 하는 삼림욕도, 해수욕도 꿈도 못 꾸는 나였다. 그렇기에 더 점쟁이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주에 부족한 ‘토’만 있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데. 아까 술사가 보여준 타로카드가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린 거야, 나?

그래, 분명 점쟁이는 ‘탑’과 ‘죽음’과 ‘소드 10’을 보여줬다. 벼락을 맞은 탑, 망자를 밟고 지나가는 해골, 칼이 꽂힌 채 드러누운 사람. 악몽에나 나올 법한 카드가 딱 3개 연속으로 뽑히다니…. 역시 내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까. 머리를 쥐어뜯는 버릇이 도지려 했다.

분명 다른 점쟁이도 수정구슬에서 내 미래를 보지 못했다고. 그때는 그냥 수정구슬과 전등갓도 구별 못 하는 노파가 뭘 알겠냐고 비웃었는데.

어쩌면 가장 한심한 건 나일지도 모른다. 눈앞에 다가온 재앙을 두고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그동안 내가 흙과 나무와 자연을 멀리한 대가인 걸까?

그래, 어차피 통장 잔고는 충분했어. 이렇게 점만 쳐봤자 기분 나쁜 결과만 나올 뿐. 나도 안다. 내 손으로 앞날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그러니까 차라리 거기에 순응하고 돈을 내 맘대로 펑펑 써버리는 건-

“자네, 설마 모든 걸 포기하려는 건 아니지?”
“네? 타로에서도 그렇고, 사주도 그렇고… 제 팔자는 원래 이런 거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제 힘으로 운명을 어떻게 바꾼다고-”
“아까도 말했을 텐데. 죽음 카드나 소드 10은 정말로 자네가 세상을 떠날 운명임을 암시하는 게 아니라고. 탑도 마찬가지야.”
“딱 봐도 불길하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희망을 갖고 살아가라는 거라면 그만…”
“말 아직 다 안 끝났네.”

그러면서 술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뭔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선반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점쟁이들은 다 이렇게 태도가 단호한가, 생각에 잠긴 그때. 술사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뭡니까?”
“보다시피 모래시계일세. 한번 떨어진 모래는 유리벽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지, 마치 바닷가의 모래처럼.”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던 감촉이 떠올라 흠칫했다. 비유를 들어도 왜 하필 그런 걸로…

“하지만 모래시계를 뒤집는 건…. 그래, 인간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래가 스스로 유리벽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인간이라면 한번 떨어진 모래를 밖에서 뒤집어줄 수 있다는 말일세.”

도대체 이게 무슨 알쏭달쏭한 소리람. 시작은 분명 사주에 ‘토’가 부족하다였는데, 언제 모래시계 이야기까지 와버린 걸까.

“또 운명을 바꾸란 말씀이십니까. 평범한, 아니 남들보다 떨어지는 인간일지도 모르는 제가요?”
“자신을 그렇게 비하하지 말게!”
“아니, 제 말은 대체 무슨 수로-”
“아까 사주에 토가 부족하니 자연을 가까이하라고 했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잠깐만, 나… 설마 생각하는 그대로 말해버린 거야? 술사가 날 이상하게 보기라도 하면…!

“왜. 내가 자네를 이상하게 볼까 봐? 괜찮네. 모르는 게 정상이야. 오히려 한 번에 알아듣는 게 이상하지.”

되려 말문이 막혀버렸다. 술사는 이런 사람을 도대체 몇 명이나 봐온 걸까.

“모래시계나 식물을 가까이하라는 건, 게 뭐냐… 게임과 유튜브를 달고 사는 대신에 식물에게 잘 자라고 인사도 하고, 모래시계가 떨어지는 걸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하라는 거네. 자연의 여유를 닮아가면서.”

네. 잘 알겠습니다. 지겨운 자연을 보면서 평화를 느껴봐라, 그거죠? 적당히 복채를 올려두고 점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돌팔이가 아니길 빌면서.

*
그로부터 3시간 후. 짠바람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갈매기 울음소리가 울리는 곳. 나는 바다에 와 있었다. 토라… 그래, 바다에 모래가 많긴 하지. 어차피 맨발로 다니면 그만이니까.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파고드는 느낌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별 수 있겠는가? 술사가 나더러 땅의 기운이 필요하다는데. 가만히 있으면 내 운명이 박살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멍하니 바다 쪽으로 걸어가다가 파도를 맞고 넘어졌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보기 좋게 엎어져서 옷이 모래범벅이 되었다. 게다가 발은 또 왜 이렇게 따끔거려. 설마 조개껍데기가….

그때였다.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 건.
연애운, 학업운, 취업운. 셋 중 하나를 바꿔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내 인생을 바꿀 동아줄이야!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나를 찾아준 사람을 향해

“여긴 무슨 일이야?”

망했다.
그 사람이다.
보기 좋게 나를 찬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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