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이야기 #1

하필 츄리닝만 입고 나온 날

by Nope

맞닥뜨렸다. 걔를.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만 입고 나온 골목길에서.

이걸 어떡해야 해. 하필 이런 몰골로 나타나고 싶진 않았는데. 아, 신발끈 묶는 척을 하면 되겠구나! 잽싸게 허리를 숙이고 발 쪽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끈도 없는 슬리퍼 차림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면 작전 변경. 나는 지금 발 밑에 물건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러니까 줍기만 하면 그만이다. 괜히 돌멩이만 몇 개 굴러다니는 아스팔트 바닥을 살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나… 이 정도면 그럴싸했으려나. 고개를 슬쩍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아직 떠나지 않은 걔와 눈이 마주쳤다. 걔가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복과 내 몰골이 자동으로 대비되는 듯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야, 노미래. 너 뭐 잘못 먹었어?”

내 이름을 들을 때마다 ‘미래가 없다’며 놀려대던 걔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16년 인생 사상 최고 속도로.

“…잘못 먹었다면 어쩔 건데. 츄리닝 입은 거 처음 봐?”

걔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더니 딱히 화나게 할 의도는 없었다, 네 말마따나 츄리닝 좀 입을 수 있는 건 아니냐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설마 나보다 더 당황한 거야? 슬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자 걔는 비웃지 말라고 길길이 뛰면서 아까보다 더 새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살다 보면 이런 풍경도 볼 수 있다는 거 다 알아. 다 아는데, 너 아파서 결석했다길래 걱정돼서 나도 조퇴하고 나온 거라고. 이상한 생각하지 마. 순수하게 노미래 네가 걱정되었을 뿐이니까!”
“안 물어봤거든.”
“그건 아는데…!”

걔는 눈을 꾹 감더니 하얀 비닐봉지를 건넸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죽 용기 비슷한 게 들어 있었다. 먹을 걸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다니, 너답다, 참.

“…먹어. 열도 났다며. 먹고 빨리 나아.”
“아, 미안. 나 사실 꾀병이었어.”
“뭐?!”
“오늘따라 눈이 잘 안 떠지더라고. 학교 가기 싫어서 수 좀 써봤지.”

순간 동그래진 걔의 눈동자.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글귀가 쓰여 있는 듯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뭐, 보다시피 뻔하잖아.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을 입고 외출할 정도라면.”
“뭐야….”

걔가 고개를 숙이고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다. ‘걱정되게’ 였나, 아니면 다른 말이었나. 얘가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또 나를 놀릴 궁리나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용건 끝났으면 나 가볼게. 조퇴한 김에 재밌게 놀아.”
“야, 노미래! 가긴 어딜 가!”

애처롭게 외쳐대는 걔를 뒤로 하고, 빌라 현관문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센스도 좋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전복죽이라니. 맛있게 먹겠다는 말은 차마 자존심 상해서 할 수가 없다.

날 지켜보는 걔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상상할수록 웃음이 새어나온다. 뭐, 내일 학교에서 보면 알려주겠지. 아닌가. 내일은 주말이었나?

뭐가 됐건 소득이 아주 없지는 않은 외출이었다. 손에 쥔 봉지가 아직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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