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나비의 날갯짓이 만들어낸 바람도

by Nope
실수로 여기 업로드하고 말았습니다.
원래는 '몽상 두 조각'에 들어갈 글이에요!

내 바람이 있다면, 바닷바람이 부는 곳에서 널 마주치지 않는 거야. 네가 항상 오곤 했던 그 언덕배기에서.

그래, 그 여름 기억나? 우리가 너무도 어리고 무모했던 시절. 혼자서 바다를 보던 네게 달려가 숨이 벅차오를 때까지 끌어안던 게 내 일과였지. 너에게서는 땀 냄새 대신 데오드란트와 바다 내음이 뒤섞인 싱그러운 향기가 났어. 더 가까이하고 싶어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곤 했지.

너도 날 밀어내지 않더라고. 신기한 일이었어. 다짜고짜 사람이 달려들면 놀랄 법도 한데, 그치? 세 음절만 말하지 않았을 뿐 우리는 …과 다를 바 없는 사이였지. 매일 밤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으니까.

네 말이 아직도 귀에 선해.
-학교? 잘 안 다녀. 거기 가서 뭐 하게.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그 이유만큼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더라고. 그래서 짐작했거든. 아, 방학이 끝나면 다시는 널 만날 수 없겠구나. 적어도 이번 여름엔 널 매일 봐야겠구나, 하고.

보통 ‘방학 끝나고 보자’는 말을 많이 하잖아. 너한테는 도저히 할 수 없겠더라고. 그래서 대신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세 음절을 내뱉으려고 했지. ‘해’로 끝나는 그 말. 잘 알잖아.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와 같이 있다 보면 계속 그 말을 삼키게 되더라고. 달이 예뻐서, 바람이 시원해서, 수면이 반짝여서. 그것도 아니면 맞잡은 손이 따뜻해서. 핑계 아닌 핑계만 대다 보니 빈번히 기회를 놓쳤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지, 밥은 뭘 먹었는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던 너였기에 더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학교가 어딘지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적어도 방학이 끝날 때까지는 함께할 줄 알았거든.

그래, 장마가 끝나고 늦여름이 시작될 때. 유독 하늘이 높고 공기가 맑던 어느 날. 넌 놀랍게도 한낮의 태양 아래 서 있었어. 매번 해질녘에만 만났기에 더 의외였지.

왜 이 시간에 나왔냐고 물었더니만 이렇게 대답하더라, 너.
-오늘 밤에 올라가거든. 짐 싸다가 재미없어서 탈출했어.

대박이지, 하고 너스레를 떨던 너한테선 역시나 레몬 향이 났어. 맡아도 맡아도 질리지 않던 향기.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아무튼 그건 둘째치고. 그날은 아주 평범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지. 네가 떠나는 날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평범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네가 부담스럽지 않을 방향으로 마음을 전하려고 했어. ‘있잖아, 나… 널 학교에서 다시 보고 싶어.’로. 학교라는 말을 해버린 게 실수였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너는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학교? 학교에서 내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기는 해?

그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지.
너는 ‘다신 학교 같은 데 안 갈 거다, 이런 대접을 받는 걸 더 견딜 수 없다’며 울음을 터뜨렸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 그 뜻이 아니었는데. 널 울리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찌할 줄 몰라 고개를 숙인 사이 넌 이미 사라졌더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시뻘건 노을이 너무 야속했어. 그 순간만큼을 기다렸거든. 네가 해질녘을 좋아한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일부러 그 시간대를 고른 건데.

하지만 널 미워하지 않았어. 학교가 싫었던 거지 내가 싫었던 건 아니었을 테니까.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을 때 우연히 복도에서 널 마주친 건 행운이었을지도 몰라.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넌 날 그냥 스쳐 지나갔지. 그때도 네가 밉지 않았어. 정말로.

그 뒤로 몇 번 널 본 것 같아. 교무실, 운동장 구석, 학교 뒤편. 아니면 하교하는 길. 이상하지…. 아는체를 하려 해도 용기가 하나도 안 나더라고. 왜였을까. 우린 방학에 매일 봤던 사이인데. 대체 왜…

그렇게 흐지부지 학년이 바뀌었네. 그래도 요즘에 학교 오는 날이 많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제 진짜로 용기가 나거든. 덕분에 이렇게 펜을 들었잖아. 난 널 아직도

*
책상에 엎드린 걔가 꽉 쥐고 있던 종이.
철없던 날의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려던 기억이 꾹꾹 눌러담겨 있었다.
잠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며 편지를 빼냈다.
그리고 편지지에 새파란 얼룩이 생기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침내.
그때 하지 못한 말을 다시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지금도 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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