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이야기 #2

꿈도 가끔은 현실로 스며든다

by Nope

초여름을 뚫고 달릴 342번 버스를 기다려. 종점에는 아마 청록색 바다가 있을 거야.

교복들로 정류장이 붐볐어. 흰 교복, 검은 생활복, 너나 할 것 없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지. 파도를 맞으며 함성을 지르려는 걸까.

너는 구석에 서서 침묵을 지켰어. 나도 굳이 그쪽을 보지 않았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더 중요했으니까. <Zebrafish>. 들으면 심해를 헤엄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노래였어.

그때였어. 네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건. 그러더니 대뜸 손을 잡더라고. 뿌리치는 게 정상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손을 놓는 순간 이 세계가 말 그대로 산산조각날 테니까.

알아, 나도. 밖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고 네 옆엔 이미 다른 여자애가 있다는 걸. 매일 땡땡이만 치는 문제아와 전교 1등 반장이라니, 애초에 우린 어울리지 않는 사이였을지도.

감긴 눈꺼풀 사이로 아마 눈물이 흐르고 있겠지. 이곳의 나는 빙그레 미소 짓지만. 마주친 눈동자가 반짝거려. 넌 아마 기뻐서, 나는 울컥해서….

그때 버스가 도착해. 아무 소음도 없이, 매끄럽게. 넌 당연하다는 듯 ‘학생 둘이요’를 외쳐. 종점까진 아마도 세 정류장. 도착할 때까지 네 어깨에 기댈 거야. 꿈이 무너질 때까지-

다짐이 무색하게, 세상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10시 10분을 가리키는 바늘만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
어차피 지금 가도 지각인 것. 학교는 포기하기로 했다. 가 봤자 담임과 학주가 ‘왜 이제 왔냐’며 신명나게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하다. 그렇다고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가 없다. 심심할 때마다 땡땡이를 친 업보일까.

하여튼 꿈에 나온 342번 버스는 정말로 학교 앞 정류장에서 멈춰 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집 앞에서 출발해 학교를 거쳐 바다에 도착한다. 왜 하필 꿈에 그 버스가 나온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타고 다녔는데.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 내 곁에는 그가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학교의 정점에 서서 빛나고 있는, 전교 1등 강석훈. 정말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물론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내가 일방적으로 걔의 연락을 받지 않았지만. 전화도 문자도 싹 다 무시했다. 매일 아침마다 깨워주러 오겠다는 것도 다 돌려보내곤 했다. 이젠 걔는 내 친구가 아니니까. 그래서……. 잊어야만 하니까.

하지만 왜일까. 걔가 다른 여자애와 붙어다니기 시작했다는 걸 알면서도, 꿈에 종종 강석훈이 튀어나오곤 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걜 하나도…

순간, 버스가 굉음을 내며 집 앞 정류장에 멈춰 섰다.
꿈과는 다르게 흙먼지까지 일으키며.

알지. 아주 잘 알아. '청소년 둘이요'를 외쳐줄 걔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걸. 하지만-

누군가가 급하게 달려오더니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 두 명이요.”

잠깐만. 모범생으로 유명한 걔가 이 시간에? 교복 흐트러지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애가?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헤집어댔다. 두통이 밀려올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걔가 날 툭툭 치더니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뭐해? 얼른 타.’

안 된다는 건 나도 알아. 분명 어색하기 짝이 없을 거라고. 난… 강석훈과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아니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팔자가 꼬이기 시작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수렁으로 걸어들어가는 모험가처럼.

그리고 몇십 분 후. 다행히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앉자마자 이어폰을 꽂아서 그런가. 덕분에 방해 없이 <Zebrafish>를 들을 수 있었다. 다행인 일이지.

종점에서 내리자 시린 바닷바람이 날 강타했다. 코끝으로 짭짤한 냄새가 몰려드는 듯했다. 덕분인지 파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하얗고 두터운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푸른빛 물 위로 펼쳐지는 포말. 그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태.

그래, 내가 이래서 바다를 좋아했지. 잠시나마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걔의 입에서 흘러나온 세 글자를 듣기 전까지는.

“최이경.”
“왜 따라왔어. 용건만 말해.”
“노미래… 어제까지 멀쩡했는데… 오늘 갑자기 열 나서-”
“노미래?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이경. 그래도 우리…”

아, 그래? 또 어릴 적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보네. 그 일이 있었을 때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구석에서 날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기만 했으면서. 끓어오르는 피를 식히기 위해… 최대한 말투를 차갑게 가다듬었다. 겨울바람보다 더 아리게.

“소꿉친구 좋아하네. 언제 적 이야기야.”

꽤나 볼 만했다. 입이 떡 벌어진 채 굳어버린 걔가.
동시에 가슴 한켠이 쿡쿡 찔렸다. 바보. 마음은 그게 아닌 걸 나도 뻔히 알면서. 왜 밀어내려고만 하는 건데. 보아하니 강석훈에게 좋아하는 애가 생긴 모양이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걸 보면.

침묵만이 감돌았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파도 소리. 깨기 싫은, 깨고 싶지 않은 정적.
그 정적을 깨버린 건 역시나 걔의 목소리였다.

“보통 병문안 갈 땐 뭘 사줘?”
“…전복죽.”

네가 항상 들고 나타났던 그 음식. 다행히 강석훈은 전복죽의 의미 따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말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그래, 나를 생각하며 짓는 미소라면 참 좋을 텐데. …들켰나?

그래. 이제 와서 인정하자면 나는 강석훈을… 아냐. 그냥 말하기 싫어. 입 다물고 있는 게 낫겠어.

되새긴다. 되새겨야만 한다. 나는 졸업사진 찍는 날에도 학교를 빼먹은 문제아고, 좋아하는 애 앞에서도 삐걱거리는 부자연스러움의 결정체이다. 반면 강석훈은 공부도 운동도 얼굴도 완벽 그 자체. 나 같은 것을 위해 왜 시간을 낭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이경.”

강석훈이 다시 침묵을 깬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나 사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꿈은 반대라더니. 나만 모르고 다 아는 기정사실. 강석훈은 노미래라는 애를 좋아했다. 축하한다고, 너 같은 잔소리쟁이를 좋다고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손뼉을 쳤다. 괜찮아. 다 괜찮다고. 난.

“약속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일 먼저 말해주기로. 너도 잊어버린 건 아니지?”

아무것도 모른 채 애써 미소 짓는 걔가 야속하기만 하다. 누군가에게는 찬란하게 빛날 청춘이라는 두 글자. 내게는 아마 암담한 족쇄겠지.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기껏 그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이 타이밍에 고백하면 최악이 될 터. 그냥 입만 뻐끔거려야겠다고 다짐했다. 파도 소리가 목소리를 덮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한다고, 너….”

걔는 이쪽을 보지 않았다.
해변에 바닷물이 부딪히며 부서지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하얀 거품이 피어오르길.
그렇게 시선을 잡아둘 수만 있다면 뭐든 족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강석훈. 여기 있지 마. 당장 전복죽부터 사러 가. 알았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차라리 희생하는 편이 나으니까. 어렸을 적 본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더라도.

다행히 강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되도 않는 소리. 그러니까 뿌리쳐야 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경. 넌 어디 갈 건데?”
“알면서도 물어? 당연히 집이지.”
“같이 가자고-”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강석훈을 뒤로 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려던 때…

지갑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꼴사납게 뭐하는 짓이야, 최이경. 진짜…!

그때였다. 강석훈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내 앞을 막아선 건.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한 목소리.

“학생 두 명이요.”

야속했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머릿속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희망이라는 불씨가. 더 답이 없을 줄 알아서, 완전히 꺼뜨려 버리려고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걘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전복죽 맛있는 집이 어딘지 아냐고. 물어봐도 대답할 생각은 없었지만.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니 머릿속이 조금 잔잔해지는 것 같았다. 버스 시동 거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어폰에서 다시 흘러나오는 <Zebrafish>에 귀를 기울이며.

파도 소리가 오른쪽 이어폰에서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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