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이야기

어떤 공이든 얻어맞으면 아픈 건 마찬가지

by Nope

“어떤 공에 맞는 게 제일 덜 아플까? 축구공, 야구공, 배구공 중에서.”

스포츠용품 가게 앞을 지나가던 이자람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뭐야, 저 섬뜩한 말은. 수틀리면 정말로 관자놀이를 향해서 데드볼을 던질 기세였다.

이자람은 몸 쓰는 재주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와 영 딴판이었다. 체육 시간만 되면 신들린 듯이 피구공을 던져대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웬만한 공은 다 잘 던지지 않을까. 잘못 대답했다가는 내 인생은 끝장이겠구나.

“어… 야구공?”
“이유는?”
“셋 중에서 제일 작으니까.”

자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제일 작은 공에 맞으면 그나마 덜 아플 것 같다고? 정답은 ‘셋 다 아프다’야. 내가 누구인데. 체육 수행평가 만점에 빛나는 전설의 이자람 아니겠어?

“오글거리니까 그만 해라. 소름 돋았어.”
“뭐가. 네가 항상 써먹는 레퍼토리에서 단어 하나만 바꾼 건데. 국어 수행평가 만점에 빛나는 고요한….”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맨날 성적을 들먹이며 자람을 귀찮게 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귀찮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말을 걸고는 싶은데 달리 할 말이 없잖아. 난 책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지루한 걸 싫어하는 자람에게 책 이야기가 먹힐 것 같아?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황금 같은 주말에 얘한테 이끌려 산책을 나온 건지. 도서관에 들어와서 신간 구경해도 모자랄 판에. 게다가 이자람은 사람이 많은 곳만 좋아한단 말야. 내향인 중의 내향인인 내가 거기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냥 집에 들어가고 싶다고?”
“어떻게 알았… 야!”
“왜? 얼굴만 봐도 알겠던데. 네 얼굴에 ‘나 집에 가고 싶어요’라 쓰여 있어.”
“얼굴에 쓰여 있긴 개뿔. 뻔한 소리 그만해. 노이로제 걸릴 것 같아.”
“그러면 너 나랑 야구장 갈 일도 없겠네. 사인볼 잡는 게 소원이었는데.”

갑자기 야구장이 왜 나와? 오늘 산책도 간신히 나온 건데.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서 우렁차게 노래를 불러대는 곳에서 버틸 자신은 더더욱 없다. 도대체 이자람은 무슨 생각인 거야…

“싫어?”
“아니…”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자람이랑 같이 가는 건데. 싫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야구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이 수천 배는 더 컸다. 운이 없으면 야구공에 얻어맞아서 의식불명으로 실려갈 수도 있고. 상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

“그래. 그럼 다음 주에 가는 거다?”
“그렇게 빨리 약속 잡지 마!”
“아… 알았어, 알았어. 다다음 주에 가자. 됐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사람 좀 많다고 해서 탈이 나지는 않을 테니까…. 제발, 미래의 내가 야구장에서 정신줄을 잘 붙잡고 버틸 수 있기를.

“그래서 오늘은 목적지가 어딘데.”
“몰라? 그냥 걷는 거지.”
“너 그러다가 저번처럼 또 노래방 갈 거잖아.”
“왜. 무대공포증이라도 있어, 너?”
“그게 아니라…!”

자람은 항상 절절한 발라드를 부르니까 그게 거슬리는 거다. 좀 신나는 노래를 부르면 어디가 덧나냐고. 예를 들자면…

“밴드 음악 같은 거.”
“갑자기 밴드 음악은 왜. 신청곡이야?”
“그럴 리 없잖아!”
“미안한데 신청곡은 안 받아. 네가 직접 불러.”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자람이 불러줬으면 한다는 것 같은 소망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 암. 그렇고말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어? 너 그러다가 진짜 야구공에 얻어맞는 수가 있어.”

…살짝 올라갔던 입꼬리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래서 그대로 인생 하직하라고요? 못 할 말을. 난 살고 싶다. 살아야만 한다고. 적어도 다다음 주까지는.

어느덧 우리는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에 들어와 있었다. 자람이 한 건물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로 가자. 세 곡에 천 원이야.”
“뭐 이렇게 비싸.”
“이 동네는 다 그래. 따라오기나 해.”
“알겠습니다….”

시작은 산책이었는데 끝은 노래방이라니. 이 무슨 엄청난 조화인가.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댈 시기는 지났다. 그래… 그냥 머리를 비우고 즐기는 수밖에.

유리문을 민다. 끝없는 복도가 펼쳐진다. 저만치서 이자람이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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