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증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by Nope

소녀가 내뱉었다.
“너는 가만히 안 있으면 비뚤어지는 병이라도 걸렸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을 뿐이었다. 동시에 소년의 목구멍을 타고 말이 올라왔다. 있지, 미안한데. 모든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려는 것 자체가 강박이야. 얌전하게 제자리에 앉아 있는다고 해서 콩고물이 떨어지기라도 해? 하지만 그는 애써 그 말을 파묻었다. 굳이 말해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소녀는 역시나 안 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부릅뜬 두 눈이 새파랗게 반짝였다. 아니, 어쩌면 컬러렌즈 때문일지도. 소녀는 몇 번 눈을 비볐다. 처음 끼는 렌즈라 그런지 이상하게 눈이 뻑뻑했다. 눈꺼풀을 붙잡고 안약을 넣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 들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아니잖아.

소녀의 머릿속을 맴돌던 언어가 말의 형태로 구성되어 튀어나오려다 사라졌다. 단어는 휘발성이 강하지,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말뭉치를 붙잡아 다시 결로시키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기억을 더듬어 가며, 그렇게. 하지만 말이라는 게 쉽게 되찾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당장 몇 초 전, 아니 몇 분 전에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판국에.

그녀는 결국 한번 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이 다시 멀뚱멀뚱 눈을 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너처럼 모든 상황에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냐고. 지금도 봐봐, 이미 한번 고개를 저어놓고 또 고개를 저을 필요가 있냐고.

소년이 생각하기에 세상은 효율적인 방향으로 돌아가는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비효율의 극치인 그녀를 가만히 두고볼 수 없었다. 저렇게 따분한 인간은 생전 처음 본다니까.

소년은 지루함에 몸을 꼬았다. 둘이 마주앉은 테이블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미동도 없는 커피잔, 포크도 안 댄 케이크. 이따금씩 소년과 소녀 주위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평화를 깨려는 듯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그런 걸까, 소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공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년은 불안했다. 왜지. 대체 왜 이러는데. 한 공간에서 가만히 있으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큼이나 비효율적인 일도 없는데. 어느덧 소년은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릇이 조금씩 흔들리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소녀는 그 작은 소리에도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히 앉아서 쉬겠다는데 왜?

강박은 강박을 낳고, 서로 다른 강박을 가진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법. 하지만 그런 그럴싸한 깨달음을 얻는 건 너무 어려운 일 아닌가. 소녀는 팔짱을 낀 채 소년을 다시 노려보았다. 소년은 지겹다는 듯이 하품을 했다. 도대체 할 일도 없이 여기서 앉아 있을 필요가 뭐가 있는데. 황금 같은 주말에 뭐하는 거냐고.

그때였다. 가만히 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계속 집중 못 하고 산만하게 있으니까 할 말도 다 사라지잖아.”

소년의 얼굴에 ‘어이 없음’이라는 글자가 스쳤다.
“내가 왜?”

“아니, 아직도 모르겠어? 나 너한테 할 말 있어서 불러낸 거라니까.”
“또 고백이라도 하려고? 미리 사양이다.”
“누가 너한테 고백한대!”
“그럼 뭔데. 용건만 빨리 말해.”
“넌 왜 이렇게 매정하냐?”
“뭐가. 내 말투가 뭐 어때서.”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테이블 위로 쇼핑백을 올렸다. 소년이 그 안을 살폈다. 패션에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생김새였다.

“나 주려고?”
“당연히 아니지.”
“그러면 왜?”

소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환불. 충동적으로 긁은 건데 너무 비싸.”
“너한테 돈이 어디 있다고….”
“그건 알 거 없잖아. 됐고, 같이 가주기나 해. 혼자 가기 무섭단 말야.”

소년이 한숨을 쉬었다. 살다 살다 환불 좀 도와달라고 주말에 불러내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게 뭐가 무섭다고.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는 소년을 소녀가 붙잡았다.

“한 번만. 응?”

소년의 머릿속에서 단어가 떠올랐다가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이윽고 하나로 모인 단어가 단정한 음성을 만들어냈다. 평소의 소년이 항상 입에 살고 달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절대 내뱉을 리 없는 말.

“그래.”

소녀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강박증이라도 있는 양, ‘가만히’ 타령을 했던 그녀가 절대 보일 리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 가끔은 강박증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는 법. 소년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알아낸 용건 덕분에 이제는…

“효율적으로 움직일 일만 남았네.”
“무슨 뜻이야?”

순간 소년이 흠칫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법이 없었다. 소녀 앞에서라면 더욱더.

“말해 봐. 무슨 뜻이냐고.”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화난 듯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한번 화가 나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까.

“일단 빨리 가자. 곧 가게 문 닫겠어.”
“뭐? 아직 덜 먹었는데?”
“진작에 먹지. 지금까지 뭐 하고 있었냐.”
“야…!”

소녀가 케이크와 커피를 입속에 욱여넣는 동안 소년은 고개를 돌리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맨날 ‘가만히’만 강조하던 모습과 천지 차이였다. 더는 차분함이라는 수식어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을 터.

어느덧 그릇이 깨끗하게 비었다. 소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입가에 생크림이 잔뜩 묻은 상태였다. 그 모습을 힐끗 본 소년이 웃음을 참으며 냅킨을 내밀었다. 소녀는 멋쩍은 듯 입을 닦더니 성큼성큼 유리문을 향해 걸어갔다. 소년이 그 뒤를 따랐다. 경쾌한 방울 소리만이 남았다.

*
먼발치에서 소녀와 소년을 지켜보던 알바생이 한숨을 쉬었다. 말소리가 큰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저렇게 화려하게 어지럽혀진 테이블은 처음 봤다. 어떻게 구겨진 냅킨 뭉치를 그대로 놔두고 갈 수가 있냐.

하지만 힘들어도 참아야 하는 법.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빨리 퇴근할 수 있을 테니까. 떨쳐내려 해도 떨쳐낼 수 없는 단어, ‘가만히’. 그리고 ‘효율성.’ 두 단어가 강박처럼 알바생의 사고방식을 지배했다. 돈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알바생은 한숨을 쉬며 행주를 꺼냈다. 그러고는 엉망이 된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8시 3분 전을 가리키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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