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총 #2

언젠가 마침표를 찍을 글

by Nope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는 말이 더 낫겠다. 바깥이 35도건 36도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영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한참의 침묵.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나도 지갑 없는데”였다.

“…대체 왜?”
“네가 밥 사준다며. 그래서 그 말만 믿고 아무것도 안 들고 온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가. 한 말에 책임지겠다고 한 사람은 너였잖아.”

말문이 막혔다. 그래. 네가 한 말이 다 맞다. 눈앞에 닥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무것도 못 먹고 지갑을 찾아 언덕길을 올라야 하는 상황. 가뜩이나 산은 해가 빨리 지는데. 그나마 여름이었기에 망정이지 겨울이었다면… 으. 세상에서 어두운 게 제일 무섭단 말이다.

“쫄보.”
“쫄보 아니라고! 네가 어두운 골목길을 안 다녀봐서 그래. 우리 집이 하필 골목 끝에 있단 말야. 학원 끝나고 가로등이 꺼진 길을 걸어다니다 보면….”
“아, 됐어. 그만 이야기해. 쫄보 맞네.”

왜 이렇게 도움이 안 되는 거야, 얘는? 가뜩이나 지갑 때문에 심란해서 돌아가시겠는데.

하여튼 자본주의 사회는 돈 없는 자에게 가혹한 법. 소프트콘도, 공짜 에어컨 바람 쐬기도 물 건너간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그렇게 쉽게 결정 짓지 마.”
“아니, 왜? 달리 할 만한 게 없-”
“지갑, 떨어졌을 거 아냐. 그냥 주워 오면 되는 거 아냐?”
“그게 제자리에 가만히 있겠냐고!”

빈손으로 패스트푸드점을 나가는 것도 서러운데 지갑까지 잃어버리다니 하늘이 노래질 것만 같았다. 이미 노래졌으려나? 뭐, 아무튼.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간 우린 그 지긋지긋한 언덕길을 올라야만 했다. 물도 없는데 중간에 계속 모기인지 파리인지가 튀어나와서 미칠 지경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수영장 물은 진작에 다 말라버렸는데 무슨 일인지. 게다가 더 거슬리는 건….

“해 지는 게 뭐가 어때서. 귀신이라도 나올까 봐?”
“당연한 거 아냐! 원래 귀신은 음기가 많은 데를 좋아한다고. 산이라든지 물가라든지…”
“이 시간에 왜 해가 져? 바닥이나 좀 자세히 봐. 지갑 흘렸다며.”
“보고 있다고!”

뚫어져라 쳐다봐도 흙바닥과 돌멩이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아… 글렀네. 카드에 학생증에, 중요한 건 지갑에 다 있는데. 대차게 망해버렸다.

결국 30분도 안 되어 난 백기를 들었다. 지갑 그딴 건 영영 잃어버린 셈 치자고. 카드야 다 재발급받으면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이 조금 귀찮아졌을 뿐.

그 와중에도 너는 여름이 시작되는 주말을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게 맞냐면서 투덜거렸다. 어이가 없었다. 낸들 이러고 싶은 줄 아나?

아무 소득 없이 내려오는 언덕길은 유독 길기만 했다.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는 너에게, 그냥 집에나 가자고 대답했다.

“벌써 헤어지자고? 아, 괜히 왔네.”
“그 뜻이 아니라. 어차피 돌아다녀 봤자 건질 게 없으니까 집에나 가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자는 거야.”
“주절주절 말도 많아. 나는 집돌이에요, 그거 아냐.”

들켰네. 너무 뻔한 수였나? 그래도 언덕길을 벗어날 핑계를 찾아서 행복했다. 역시 난 천재야.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엥?”
“원래 이 시간엔 아무도 없어.”

너는 잘되었다고 손뼉을 쳤다. 난 전혀 즐겁지 않은데. 우리 집에는 놀 만한 게 하나도 없단 말이다. 먼지 쌓인 부루마불을 빼면.

다행히 너는 구닥다리 보드게임 상자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요새도 이런 게임이 있냐, 안 그래도 부동산 부자 체험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하면서. 주사위를 손에 쥐고 살살 굴리는 네게 조용히 돈다발을 내밀었다.

“우와. 나한테 주는 거야?”
“그럴 리 있겠냐. 게임용 돈이야.”
“뭐야, 재미없게.”
“그럼 하지 말든지.”

너는 고개를 저었다. ‘보드게임이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아요’ 같은 눈빛을 지으면서. 억지로 꾸며냈다는 점, 다 안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승자는 나일 테니까. 내게는 주사위의 신의 가호가 함께한다. 거짓말이래도 좋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오늘따라 주사위도 더위를 먹은 모양이었다. 네 손에 있을 땐 12, 10, 8이 잘만 나오더니, 내 손으로 넘어오는 순간 5, 3, 6 같은 애매한 숫자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게 패망의 전조였던 걸까.

파산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둔 땅은 다 팔아치웠다. 하지만 주사위를 굴리는 족족 네 땅에 멈춰섰다. 자연히 잔고는 뚝뚝 떨어졌다. 이기지도 않았는데 환호성을 질러대는 네가 슬슬 신경에 거슬렸다. 도대체 어쩌다가…

“포기할래?”
“차라리 그러고 싶다.”

사람들은 말한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 태도가 미덕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일이 너무 안 풀릴 때는 때려치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 당연한 진리를 새삼스레 깨닫다니. 내 폼도 많이 죽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한 바퀴를 놔두고 백기를 들었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하는 싸움인 거, 잘 도망치는 게 낫겠지. 자리를 대충 털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책상 위에 얌전하게 놓여 있던 지갑을 발견한 건.
왜 지금까지 이런 고생을 한 걸까.
눈앞이 다시 아찔해졌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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