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이야기 #4

글쓴이는 민초파입니다

by Nope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스터디카페 임시 휴업? 기껏 엘리베이터도 없는 곳을 올라왔는데?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내 팔자에 없는 공부, 애초에 시작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어.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강석훈은 벽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핸드폰을 바쁘게 두들겼다. 몇 분이 지났을까. 걔가 내 앞에 불쑥 화면을 내밀었다. 지도 위에 무언가가 점처럼 찍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전부 스터디카페였다.

“죄다 임시 휴무, 영업 종료, 정기 휴무잖아. 오늘 무슨 날이야?”
“그러게. 오늘 무슨 날인가 보네.”
“말은 쉽지. 넌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냐? 사람을 어두운 건물 꼭대기까지 끌고 와선.”
“꼭 스카에서만 공부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카페도 있고 도서관도 있고. 그리고 또…”

역시 강석훈. 이 상황에서도 공부 이야기밖에 안 나오는 걸 보면 전교 1등은 1등인가 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뭐가? 공부 이야기 같은 건 아직 하나도 안 했는데. 됐고, 계단을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5배는 더 위험하대. 난간 꽉 잡아.”
“알았어. 알았다고.”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1층 문을 열자마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확 밀려왔다. 역시 여름은 여름인가 보다. 모기 떼나 나타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노미래. 잠깐만 기다려. 자전거 끌고 올게.”

강석훈은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차가운 음료수 캔이었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원 플러스 원인데 내가 다 마시기 좀 그래서. 목마를 테니 마셔.”

그런데 그 음료수가 하필이면 홍삼 드링크라니. 입맛하고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같은 걸 좋아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해, 말아야 해?

“아냐. 나 별로 목이 안 말라서.”
“거짓말. 아까 엄청 헉헉거리던데? 맛이 좀 쌉쌀해서 그렇지, 홍삼은 건강에도 좋아. 연구 결과에 따르면 홍삼은…”

그러면서 강석훈은 홍삼의 효능을 줄줄이 읊어댔다. 면역력 증진, 피로 회복, 기억력 개선, 어쩌고저쩌고.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저런 걸 다 어떻게 외우고 다니나 심히 의문이었다. 일장연설을 마친 강석훈이 다시 나한테 헬멧을 씌웠다. 여름이라서 땀 차고 갑갑한데…. 하지만 안 썼다가는 또 잔소리 세례를 맞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가만히 있는 수밖에.

자전거가 달리기 시작했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아까 흘린 땀이 조금이나마 식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얘, 왜 아까부터 한 마디도 안 해. 원래 자전거 탈 때는 조용해지는 건가? 그래. 앞으로는 자전거 좀 자주 태워달라고 해야겠어. 그래야 잔소리를 덜 듣지.

강석훈은 계속해서 핸들을 꺾었다. 신호가 없는 골목길을 요리조리 달려가는 건 덤이었다. 어딜 가냐고 묻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공원.

“여기 공원 가는 길 아닌데?”
“지름길이니까 믿고 앉아 있기나 해.”

고저가 없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시원하게 느껴졌… 아니. 사람 목소리가 어떻게 시원할 수 있어. 말도 안 된다, 이 상황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석훈은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가로등 불빛만이 환히 켜진 밤이었다.

*
피크닉 테이블은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머리 위에서 따뜻한 하얀색 불빛이 쏟아졌다.

“주광색 조명이 공부하기에 좋대. 적어도 노랑 조명보다는 덜 졸리니까.”

어느새 문제집을 펼친 강석훈이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알 수 없는 공식이 빼곡하게 채워진 노트까지 꺼낸 건 덤이었다. 공부하기 싫으면 수학 문제 푸는 거 구경하랬지….

종이 위에서 연필이 춤을 추었다.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씨로다. 괴상한 수식과 기호가 이어져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외계어를 받아적으면 이런 느낌일까. 봐도 감이 잡히지 않는 현상이라니, 이건 기적이다.

한참을 그렇게 문제 푸는 걸 구경하자니 슬슬 잠이 왔다. 테이블에 엎드리려던 때. 정수리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거면 누워서 자.”
“여기 누울 데가 어딨다고 그래?”
“저기 벤치 있잖아.”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멀쩡한 사람을 테이블 밖으로 쫓아내는 게 어디 있어…! 하지만 그 생각은 말이 되지 못했다. 입 안으로 뭔가 달콤하고 동글동글한 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막대사탕?”
“어. 너 딸기맛 좋아하잖아. 먹어. 졸리면 산책도 좀 하고.”
“…넌 어떻게 그렇게 맨날 공부만 하냐. 재미없지 않아?”

빠르게 문제를 풀던 강석훈의 손이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석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었다.

“그럴 일이 있어. 너 최이경이라고 알아?”
“최이경? 처음 듣는 이름인데.”
“모를 거야. 옆 학교 다니니까.”

강석훈은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초등학교 때 우연히 알게 된 애야. 도와주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
“여자야, 남자야?”
“넌 그 와중에 그게 중요해?”
“궁금할 수도 있지, 왜.”
“여자다.”

여자라고. 음, 그래. 세상의 반은 여자다. 그러니까 질투 같은 거 해 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 질투가 날 만한 상황도 아니고.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부럽긴 하잖아. 난 강석훈을 올해 처음 알았는데! 둘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친하게 지냈겠구만.

아니. 전혀, 절대, 하나도 부럽지 않다. 잔소리쟁이 강석훈과 붙어다니는 이유는 단 하나, 걔가 먹을 걸 잘 사주기 때문이다. 저번에도 그랬고. 마라탕이 아니었다면 걔를 따라서 스터디카페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노미래. 내 말 안 들려? 네가 하도 내 말이 잔소리 같다고 그러길래 이유 좀 설명해주려고 했건만. 사람이 말할 땐 집중해야지. 어?”
“나도 안다고. 그래서 아까 하려다 만 말이 뭐야?”
“최이경. 도와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

내가 약한 사람이라서. 강석훈은 고개를 숙였다. 야, 설마… 우는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니다. 눈이 뻑뻑해서 그래.”
“거짓말.”
“아무튼 걜 도와주지 못한 건 어찌 보면 내가 약한 탓이었잖아. 그래서 강해지기로 한 거야. 사람들이 그랬거든.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강한 사람이 되라고. 최이경 같은 문제아는 신경 쓰지도 말라고. 하지만 난…”

마음이 복잡해졌다. 옛날 일이 뭐가 중요해, 같은 말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단어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은 건.

“만나면 되잖아.”
“그럴 수 없어. 걔한테 네 이야기를 해버렸더니 반응이….”
“에이. 설마 알지도 못하는 애를 싫어하겠어?”
“이경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만만치 않을지도 몰라. 괜찮겠어?”

당연히 괜찮지. 별 일이야 있겠어?

“지금 부르면 나올지도 모르겠다.”

강석훈이 휴대폰을 꺼내 바쁘게 키패드를 눌렀다. 그리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응. 어디야? 왜 이제 전화하냐고? 그냥. 제대로 소개하고 싶은 애가 있어서. 너도 알 거야. 노미래라고….

전화를 끊은 강석훈이 대답했다.

“곧 나온대. 조금만 기다려. 아, 저기 온다. 긴 생머리. 보여?”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를 입고 나온 늘씬한 여자애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 저 친구구나. 괜스레 두근거렸다. 나 노미래. 성질 더러운 강석훈까지 사로잡은 친화력 만렙. 새로운 친구 정도야 금방 사귈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경이가 어떤 애인지.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얼마나 세게 받았는지조차도.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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