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사탕 먹고 싶네요
“안녕.”
이걸 뭐라고 해야 해.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경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머리카락은 윤기 있게 찰랑거리는데 자다가 깬 표정인 게 상당히 인상 깊었다. 아니면 정말로 자다가 깬 모양이었다.
강석훈도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이러면 나만 멀뚱멀뚱 이경이를 쳐다보고 있는 게 되잖아. 괜스레 뻘쭘해져서 뒤통수로 손을 가져갔다. 머리 또 다시 빗어야겠네.
아무튼 승산은 있다. 적어도 난 말똥말똥하다고. 자다가 깬 여자애와 승부라면 쉽게 이길 수 있어. 나냐, 이경이냐. 누가 강석훈을 사로잡을 것인가! 세기의 매치의 막이 오른다! …뭐라는 거냐, 나.
이경이는 강석훈이 앉으라고 손짓하는데도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기싸움이라도 할 작정이었나 보다.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건 싸움 구경. 어디 팝콘 없나? 모처럼 만난 소꿉친구와 운명적인 재회. 이거 영화 한 편 뚝딱이다. 장르는 로맨스만 아니면 된다. 왜냐고? 강석훈 옆자리는 내 거…
방금 한 말은 제발 잊어주길 바란다. 내가 졸려서 헛소리를 다 하나 보다. 뭐가 됐건 간에, 이경이는 강석훈을 노려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빛이 살벌한 걸 보니 어디 눈싸움 대회 나가면 이기겠는데.
못 이긴 척인지, 정말 못 이긴 건지. 강석훈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경이를 향해 걸어왔다.
“다리 안 아파? 일단 앉아.”
역시 이경이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깐만!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는 건 반칙이지! 강석훈은 셔츠 깃이 잡힌 채로 버둥거렸다. 아무리 강석훈이 운동 만능이라고 한들, 갑자기 들어온 공격에는 저항할 수 없었나 보다.
이경이는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살벌한 눈빛으로 강석훈을 노려봤다. 시시각각으로 주변 온도가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는 눈을 깔고 못 본 척하는 게 상책이다. 강석훈과 최이경이 찍는 막장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밀려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뭐 어때…. 나는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로맨스물의 주인공이 될 건데. 이 와중에도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내가 한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침묵을 깬 건 이경이었다.
“그렇게 네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는 연락도 안 보더니. 왜 이제야 불렀어?”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니, 차분한 척하는 목소리였다. 깨지기 직전의 살얼음판. 그 밑에서는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터. 이대로라면 폭발하고 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강석훈은 여전히 멱살이 잡힌 상태였다. 이경이가 상당히 힘이 센 모양이었다. 되게 여리여리하게 생겨서는 의외인데.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건 제발 불똥이 내게 튀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온갖 신이시여. 이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게 도와주소서. 이럴 때만 신을 찾는 인간이지만 이번 한 번만….
하늘에 내 기도가 닿은 걸까? 이경이가 손을 놓았다. 강석훈은 무릎이 꺾였는지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빳빳한 청바지가 흙투성이가 되었다.
달려가서 일으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강석훈에게 아주 작은 신체 접촉이라도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이경이가 폭발하겠지. 그리고 수학 문제집이 날아다니고.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는 연필과 문제집을 거칠게 집어던지는 이경이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연필심이 부러지고 문제집이 구겨지고. 그리고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지금 내 처지가 사랑싸움 한가운데 낀 불청객이 아니면 뭐겠냐. 강석훈이 이경이 부른다고 할 때 괜히 좋다고 해서….
아니다. 이건 삼각관계다. 강석훈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러브 트라이앵글.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 이경이와 나와 강석훈이 있다. 그동안은 절대 만날 수 없을 줄 알았건만 왜 이제 알아버렸을까. 최이경의 존재 따위 모르고 사는 게 마음이 편했을 터였다. 그냥 나랑 강석훈이랑 둘이서 알콩달콩 지내면서. 그 ‘알콩달콩’이라는 게 강석훈에게 가능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마침내 강석훈이 일어서서 바지를 털었다. 그 앞,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자리에 팔짱을 끼고 선 이경이가 굉장히 길쭉해 보였다. 부럽다, 저 늘씬함. 난 땅딸막하기만 한데.
다행히 문제집과 연필은 테이블 위에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이렇게 된 거 강석훈 글씨체 구경이나 좀 할까. 그런데 얘, 문제집이 낙서 하나 없이 깨끗했다. 어쩌면 나랑 문제집 상태가 똑같을 수 있지? 차라리 노트를 봐야 하나….
그때였다. 순식간에 긴 팔이 뻗어와서 노트를 낚아챘다. 정수리 위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마.”
“어차피 봐도 못 알아들어.”
“그게 아니라….”
강석훈이 나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진짜 모르겠어, 라고. 뭐지. 노트 한켠에 나랑 이경이를 비교하면서 낙서라도 해놨나? 그럼 더 봐야지. 최대한 입꼬리를 올리면서 강석훈에게 다가갔다. 얼굴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 모습에 질렸는지, 강석훈은 혀를 내두르면서 노트를 건넸다. 역시나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수학 공식과 풀이 과정으로 보이는 무언가 말고는 정말 건질 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노트 사이에 편지나 돈을 숨겨두곤 한다. 그런 게 팔랑팔랑 떨어지지 않을까 거꾸로 노트를 들고 흔들었다. 역시나 웬 종이 하나가 테이블 위에 툭 떨어졌다. 보아하니 편지지 같았다. 좋았어, 놀림거리 +1 적립. 강석훈이 이경이에게 편지라도 썼나 보다.
천천히 편지지를 펼쳤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편지지에 쓰인 건….
“사람 불러놓고 뭐 하는 거야? 그나저나 네가 노미래인가 보네. 하필이면 저런 애랑 붙어다닌다니. 너도 고생이 많다.”
감정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이가 내 손에서 편지지를 낚아챘다. 그러더니 읽기 시작했다.
“다음 등차수열의 합을 구하시오. ”
아, 그거였어? 편지지를 노트 대용으로 쓴 거였구만. 시시하게 그게 뭐야…. 그때 무미건조하게 흘러나오던 풀이 과정이 멈췄다.
“뭐야. ‘노미래가 좋아하는 것은 마라탕, 놀기, 막대사탕. 싫어하는 것은 공부, 잔소리, 나. 최이경이 좋아하는 것은 바다, 잠자기, 책. 싫어하는 것은 나’…?”
“거기까지.”
순식간에 이경이에게 다가온 강석훈이 다시 편지지를 낚아챘다. 이경이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강석훈을 보며 키득거렸다. 아니, 어쩌면 헛웃음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안 어울리게 이런 짓은 왜 해?”
“늦었다. 얼른 들어가. 난 노미래랑 들어갈 테니까…”
“아까부터 계속 노미래, 노미래! 도대체 걔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나한테는 중요해.”
“진짜로? 웃기고 있네….”
“너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 너한테 멱살 잡히려고 불러낸 거 아니었어.”
공기가 다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란 말야.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 어쩌지. 차라리 빨리 아침이나 왔으면 좋겠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마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때렸다.
“노미래! 너 왜 학원 안 갔어!”
“어차피 늦을 게 뻔해서 안 갔다, 왜!”
“너 집에 들어오기만 해봐. 용돈 없을 줄 알아!”
“알았다고! 그런 거 없이도 먹고살 수 있어. 끊어!”
한숨을 내쉬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잔소리는 강석훈 한 명에게 들어도 족하다고. 엄마까지 이러면 난….
“너 스피커폰이었지? 다 들었어.”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목소리. 강석훈이었다. 다른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노미래라고 했지. 너 의외로 마음에 든다?”
이경이까지도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잠깐만. 내 멱살까지 잡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겠지…? 눈앞으로 뻗어오는 손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으려던 때.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악수하려고 한 거야. 알다시피 이름은 최이경.”
‘잘 부탁해’ 같은 뻔한 인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거 안심해도 되는 건가? 옆에서 강석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래. 제발 사이좋게 지내라.”
“들었잖아. 우리 둘 다 강석훈을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
막상 화해하는 분위기가 되니 김이 샜다. 아까는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는데. 이렇게 쉽게 끝날 거였으면….
“이제 용건 없지? 나 들어간다. 또 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흔드는 이경이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나 괜찮은 거 맞겠지? 지금도, 앞으로도….
이내 강석훈이 전봇대에 대둔 자전거를 끌고 돌아왔다. 그리곤 내게 손짓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열대야가 내려앉은 도시는 꿉꿉하기 짝이 없었다. 페달을 밟는 강석훈을 꽉 붙잡고 더운 바람을 들이마셨다. 머리에 얹힌 헬멧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나더러 용돈도 없다고 그랬으니까.
마침 횡단보도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때다. 강석훈에게 오늘 집 들어가기 싫다고 투덜거렸다. 너네 집에서 재워주면 안 되냐고.
“그래도 집은 들어가야 할 거 아냐.”
“언제 한번 너네 집에 놀러오라며!”
“낮에 오라는 거지, 밤에 오라고는 안 했다.”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집에 가면 용돈도 못 받게 생겼는데 구해주지는 못할망정…. 강석훈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덧붙였다.
“그럼 내일 바다나 보러 가든가. 이경이도 불러서.”
“이경이랑 나랑 너랑 셋이서? 음… 꼭 셋이어야 해?”
“이경이, 이래봬도 나쁜 애는 아냐. 같이 놀면 재밌을 걸.”
“그러든지.”
강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성립. 외출금지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몰래 나갔다 오면 그만이다. 난 할 수 있으니까.
“아무튼 곧 너네 집이네. 내려. 여기서부턴 걸어갈 수 있지?”
“당연한 걸 왜 물어.”
“그래. 그러면 내일 도서관 앞 정류장에서 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던 때, 강석훈이 막대사탕을 건넸다. 이번에는 딸기 크림맛이었다.
“너무 많이 사서 그래.”
심드렁하게 내뱉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광대뼈가 올라가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고맙다고 답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히 들어가.”
“당연한 걸!”
막대사탕을 문 상태로 아파트에 있는 벤치로 걸어갔다. 집에 들어가기 전 잠깐의 평화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곧 잔소리 폭격을 맞겠지만 상관없다. 막대사탕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