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프롤로그만
그래. 내 그럴 줄 알았다. 기껏 더위를 뚫고 왔더니만 품절이라니! 내 이름은… 비밀이다. 패션 테러리스트 이아린을 사람으로 만들어줄 전담 코디네이터다. 최근에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겼다는 SOS를 받고 최선을 다해 걔를 도와주고 있다.
걔의 업적을 하나씩 읊어보자면 참 가관이다. 양말에 샌들 신기, 하늘하늘한 연분홍 원피스에 해골무늬 에코백 들고 나오기, 원피스에 회색 목양말 신기. 가만히 놔두면 청바지 위에 치마를 걸치는 대참사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여튼 팝업스토어 문짝 앞에는 ‘Sold out’ 팻말만 걸려 있었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바로 옆 배너에 쓰인 ‘재입고 예정 없음’.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던 땀이 차갑게 식었다. 분명 지금 기온은 35도랬는데. 체감 온도만큼은 15도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혹시 몰라 들고 온 휴대용 선풍기마저도 제 쓸모를 잃었다. 이게 대체 무슨….
그때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안 봐도 비디오다. 아린이겠지. 아니나다를까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웬 괴성이 흘러나왔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2배속으로 돌린 듯한, 더 쉽게 말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너무 말이 빨라서 그런지 다시 말해달라고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얘 더위 먹은 거 아냐? 귀신 들렸나? 아니면 차이기라도 했나? 좋아하는 사람은 일단 붙잡고 보라고 했지만, 정신을 놓을 때까지 집착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쉽지 않네. 너 할 수 있지? 누가 뭐래도 난 걔의 하나뿐인 친구니까…
“내 말 들려?”
아, 드디어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럴 리가 있겠냐. 당연히 못 알아들었지. 조금 더 천천히 말하라고 했던 그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신호음이 안 들리는 걸로 보아 전화 자체가 끊기지는 않은 것 같았다. 침묵만이 맴돌았다.
그 순간. 웬 나직한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늘어진 카세트에서 흘러나올 법한 소리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터였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도대체 어떤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무게를 잡는 거야?
“나… 데이트 신청 성공했어. 영화 보러 가기로 했어.”
딱 봐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 톤이었다. 그래. 같이 영화 보러 가는 거야 별 거 아니지. 팝콘통 안에서 손끝이 스치다가 눈을 마주치고 스파크가 튈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세상은 픽션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난 아주 잘 안다. 유감스럽게도.
하지만 걔한테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린이의 기나긴 솔로 인생을 끝내줄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아린이는 입버릇처럼 연애하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남의 연애사에 미주알고주알 참견하는 건 내 취미가 아니다. 절대, 전혀, 하나도.
이따가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골목길 구석에 놓인 자판기로 가서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렸다. 자판기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어서 상당히 불안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기계가 돈을 먹지 않기를 간절히 비는 수밖에.
몇 번 자판기를 걷어찬 끝에 콜라 한 캔을 얻을 수 있었다. 캔을 여니 칙 소리와 함께 탄산이 올라왔다. 바로 한 모금 마셨다. 따갑고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느낌이 짜릿했다. 이거지. 이래서 내가 콜라를 먹는 거야. 다른 음료수? 탄산으로 취급도 안 해. 아, 천국이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구나…
순식간에 콜라 캔을 비웠다. 근처에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아서 대충 발로 밟고 자판기 아래쪽으로 밀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들려? 내일이라고. 나 내일 데이트하기로 했어!”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하는 게 어딨어. 신나는 건 알겠는데-”
“야.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래서…”
“도와달라고? 알았어, 끊어.”
수화기 너머에서 얼떨떨한 포즈로 서 있을 아린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걔와 나는 어디까지나 친구일 뿐이다. 왜, 그런 거 있잖는가. 서로 돕고 사는 사이. 그러니 다 친구 좋자고 하는 일이다.
다시 번화가로 나오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걸어가고 있었다. 쇼핑을 좋아하지만 인파라면 기겁하는 나로서는 최악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길도 없는데.
인파를 어찌어찌 뚫고 걸어가던 때였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치고 다닐 사람이라면 한 명밖에 없다. 고개를 돌리니 아린이의 올라간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희한한 일이었다. 걔가 웃는 걸 요새 본 적이 없었는데….
“또 너냐. 여긴 뭐 하러 왔어.”
“당연히 쇼핑하러 왔지. 데이트하려면…”
“내가 혼자 쇼핑하지 말라고 했지? 소화하지도 못할 옷을 살 바엔 그냥 거적때기를 두르고 다니라고.”
“뭐가! 나 좀 냅둬!”
이마에 자동으로 손이 올라갔다. 내일 데이트 간다며. 냅두긴 뭘 냅둬. 아무튼 여기서 실랑이해 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마침 근처에 노란색 카페 간판이 있었다. 아린이의 팔목을 붙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난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지만, 분명 걔라면 달달한 음료수를 먹고 싶다고 하겠지. 돈이 좀 깨지겠지만 상관없다. 걔의 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할 수 있으니까.
“뭐 마실래?”
“바닐라 라떼! 아이스로.”
진동벨을 들고 아린이가 잡아둔 자리로 향했다. 아린이는 진동벨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더니 가운데에 손가락을 얹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이럴 땐 참 애 같다니까.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아린이가 손뼉을 쳤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단 게 그렇게 좋나? 어디까지나 아린이를 좀 조용히 시키려는 거였는데. 효과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그런데 막상 아린이의 입을 막으니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운을 어떻게 떼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꿎은 아메리카노만 빨대로 휘저었다. 테이블 사이로 얼음 부딪히는 소리만 맴돌았다. 도서관 열람실도 여기보단 시끄럽겠다.
침묵을 깬 건 아린이였다.
“나, 부탁할 게 있어.”
“뭔데.”
“내일 데이트한다고 했잖아. 너무 떨려서 그런데…”
아린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음 말을 내뱉었다.
“너랑 데이트 연습해도 돼?”
얘,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나랑? 왜 하필?
“알잖아. 나 친구 너밖에 없는 거.”
그래서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딱 한 번만. 응?”
아린이가 눈을 반짝였다. 나왔다, 저 배고픈 강아지 같은 표정. 왠지 모르게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 괜찮겠지? 저 오글거리는 상황에서 버틸 수 있겠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