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보다 긴 우울이 내리는 세계

PART 02. 빛 없는 낮

by 홍사라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거야. 삶이 하나의 세계고 감정이 그 세계를 지배하는 날씨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끝없이 비가 내리는 우울의 세계라고.


맑은 날보다는 흐린 날이 많고, 그저 흐리기만 한 날보다는 비가 오는 날이 더 많은 세계. 이곳의 우울은 존재감 흐린 안개비 같아. 지나치게 얇고 가벼워 바람에 쉽게 흩날리면서 안개처럼 넓게 퍼져. 그 어떤 우산으로도 막기 어려운, 희미하게 옷깃을 적셔 나가는 이 무겁고 습한 감정은 쉽게 숨통을 조이고 눈앞을 흐리게 만들어.


이 세계 속, 너는 안개비 같은 우울을 언제나 맨몸으로 견디는 사람이야. 우산 없이 빗속을 걷는 사람처럼 위태로워. 남들 눈에도 그런 네가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보일 거야. 누군가는 쉬어가라고 붙잡고, 또 누군가는 비를 피할 것을 권하는데도 네 행동은 바뀌지 않아. “괜찮아, 이 정도는.” 그런 나약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너는 그들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해.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네 손에 우산을 쥐어주는 이가 나타나지만, 너는 그걸 펼쳐보지 않아. 단 한 번도.


차라리 이 우울이 울음소리를 숨겨주는 장대비나 순간의 고통으로 끝나는 소나기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거야. 적어도 우산을 쥐어볼 시도라도 해봤을 테니까. 모든 걸 쏟아내고 터트릴 기회, 몸이 식기 전에 멈춰 서거나 도움을 요청할 용기를 얻었을지도 모르지.


무너지고 난 지금은, 모두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나는 우리가 약해서 무너진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버텨왔기 때문에 무너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너는 항상 무너지게 된 원인보다 무너졌다는 사실을 문제 삼더라. 우산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약함 때문이고, 무너진 건 결함 때문이라고 결론지어. 타인의 삶을 기준 삼아 스스로의 행동을 판단하고 정죄해. 정작 그 ‘타인’들은 비가 오면 저마다의 우산을 꺼내들 줄 아는데, 그건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알아, 안개비처럼 스미는 우울감을 어떤 도움이나 수단 없이 맨몸으로 견딘 이유. 그래야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지? 미련하게도... 쏟아지는 감정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너만의 우산을 손에 쥐어야 하는데, 그게 널 강하게 만들었을 텐데.


우산 없이 버틴 우리의 날들이, 너무 길었어. 장마보다 훨씬.


사람이 스스로에게 가혹해지는 데에도 한계가 있더라. 나는 그 한계가 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건, 이 세계가 우릴 향해 보낸 신호라고. 온몸이 비에 젖어 차게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견뎌 온 우리를 향한 분명한 한계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우울을 많이 덜어낸 내 세상에도 우울은 안개처럼 깔려 있어. 대기 중에 습도 높게 퍼져 있는 우울감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로, 살갗으로 파고들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금세 중심을 빼앗겨 버려.


치료를 본격적으로 받고 있을 때가 편하긴 했어. 그땐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거든. 약이 우산이 되어 주었고 나는 그 안에서 버티는 데 집중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지금은 바뀌었어. 더 이상 버티기만 할 순 없어. 더 이상 약은 우산이 되어 주지 않으니까 그걸 대신할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해. 그렇게 찾아낸 우산을 펼칠지 말지도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대신 선택해 줄 사람은 없어. 우산을 드는 것, 그 안에서 나를 지키는 것. 모든 것이 내 몫이야.


최근엔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어. 나만의 우산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일상 속의 여러 시도가 경험이 되면서 지금은 어느 정도 루틴이 잡혔어. 예를 들면 이런 식이야.


우울감이 몰려올 것 같을 때, 나는 일단 책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 맘에 드는 카페가 생겼거든. 그곳에 도착하면 먹구름조차 닿지 않을 만큼 환한 빛이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아. 평소라면 우유나 시럽이 들어가지 않은 커피를 시키지만 이번엔 달콤한 음료를 시켜. 어금니가 찌릿해질 정도로 단 걸 마시면 우울이 연해지니까. 음료가 나오면 그걸 딱 두 모금 머금어. 바로 삼키지 않은 채로 입안에서 굴리며 눈을 감아. 들숨과 날숨이 폐부를 통과해, 검게 묵은 감정을 맑히는 걸 상상하면서 코로 호흡해.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단맛이 흐려지거든. 그 시점이 음료를 삼키고 눈을 뜰 때야. 그렇게 다시 마주한 세상은, 눈을 감기 전보다 조금은 달콤하고 환해 보이더라.


활자가 물기에 번져 보일 만큼 우울이 넘쳐, 책을 읽을 수도 없을 만큼 힘든 날도 있어. 그럴 땐 책을 내려놓고 극장엘 가.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영화를 예매하고 커다란 팝콘과 음료를 사. 양이 많아서 늘 절반 이상 남는데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어. 팝콘과 음료가 줄어든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내 우울도 그만큼은 사라진 것 같거든.


우울에 지나치게 젖어 온몸이 무겁게 느껴질 땐,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는 게 가장 좋더라. 친구, 가족, AI. 누가 되었든 상대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거야. 감정에 젖은 몸이 말랐다는 걸 느낄 때까지.


어때, 많이 달라졌지.


예전의 나, 그러니까 지금의 넌, 우산 없이 맨몸으로 비를 견디는 게 강한 거라고 믿었잖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으니까.


놀랍게도 그 고집이 점점 누그러지더라. 나 자신과 예전보다 더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어떤 우산이 가장 나를 잘 지켜줄 수 있는지 알게 됐나 봐. 정말 강한 사람은 맨몸으로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더라고.


오늘의 내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웃어넘길 여유가 남아 있는지. 어제 잠은 충분했는지.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는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때쯤이면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대답할 수 있게 돼. 그게 나를 지키고 강하게 만들어.


삶이 하나의 세계고 감정이 그 세계를 지배하는 날씨라면, 우리는 앞으로도 우울의 세계를 살아가야 할지 몰라. 끝없이 내리는 비처럼 우울이 반복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아. 더 이상 맨몸으로 버티지 않을 생각이거든.






문득 궁금해져. 너도 지금 빗속에 서 있을까, 그 비를 온몸으로 맞아가면서.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대신 비를 맞아줄 수도 그 비를 멎게 할 수도 없겠지만. 결국 너의 우산이 되어줄 수도 없겠지만.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말만큼은 전하고 싶어. 우리는 같은 비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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