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기록하고

PART 02. 빛 없는 낮

by 홍사라

한동안 먹지 않았던 비상약을 비웠어.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아. 몇 봉지를 비웠더라. 지금 느끼는 감정을 문장으로 곧장 옮기지 못할 만큼은, 그러니까 키보드 위에서 약간 헤매고 있을 만큼은 먹은 것 같아.


너도 알겠지만 정신과 약이란 게 이것저것 둔해지게 하잖아. 생각, 호흡... 살아 있다는 자각.


약을 먹었다는 건 나 자신을 저울에 올리고 말았다는 뜻이기도 해. 지금의 너, 그때의 내가 자주 했던 행동 말이야. 버릇을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무언가 대단하고 심각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야. 그저, 괜찮다는 말로 넘어가기 어려운 사소한 일들이 자꾸 생기더라고. 너는 알겠지만, 남들에겐 사소해도 우리에겐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있잖아. 타인과 공유하기 어려운,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너와 나만이 알고 있는 삶의 버겁고 사소한 그 지점. 그런 고비들이 최근에 자주 있었어. 그걸 약 없이 넘는 게 버겁더라고.


지금 심정은, 두렵고 솔직히 무서워. 이번 글은 내가 너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것도, 더 나아온 것도 없다는 고백이 될 것 같아.


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나에게도 위로가 필요해, 지금의 네가 간절히 바라듯. 사실은 지금도 나아지려고 애쓰는 중이야, 네가 매일을 견디듯.






나인 너. 오랜 시간 동안 너를 사랑하려 애쓰며 너에 대한 여러 가지를 알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네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편이라는 걸 알게 됐어. 너의 그런 경향은 네가 초라하고 작아질수록 더 심해지더라.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네 안에는 너 자신을 처벌하는 걸 전제로 한 재판이 벌어져. 응원단을 꾸려도 시원찮을 판인데, 상황이 아닌 결과를 증거 삼고 원인보다 노력을 저울에 올려.


‘그래서 결과가 뭔데. 네가 이 정도로 아파하는 건 좀 과해. 네가 증명한 게 뭐 하나라도 있어? 제대로 된 결과물도 없잖아. 이만큼 했는데도 고작 여기까지라는 건 네가 틀린 거야. 약까지 먹으면서 버티는 건 비정상이야. 계속 이렇게 사는 건 의미가 없어. 당당하게 증명하며 사는 그들을 봐. 너와는 다른 저들을 보라고.’


그 저울질 속에는 너를 위한 변호 따윈 단 한 줄도 존재하지 않아서, 모든 건 마주 보기만 해도 베일만큼 날카로워서, 너는 늘 그 앞에서 고개를 숙여.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죄인이 돼.


재판은 일방적이야. 증거는 충분하고 변론은 필요 없어. 어쩌면 재판을 벌이기 전부터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었는지도 몰라. 너를 죽고 싶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이나 지금 울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감형 사유가 되지 못해.


그럴 때 약이 도움이 돼. 그건 재판을 잠시 멈추게 하거든. 저울의 나사가 뭉개지고 삭으면서, 생각이 멀어지고 대신 몸의 감각만이 남아. 두 손의 무게, 혀에 남은 쓴맛, 눈꺼풀의 두꺼움. 살아 있다는 자각도 그제야 견딜만한 감각으로 바뀌지.


물론 만능은 아니지. 약은 저울질을 그만두게 해 주지도 않고, 판결을 바꿔주지도 않아. 세상을 바꾸지도 못하지. 그냥 잠시 멈추게 만들 뿐. 약효가 가시면 본래 버릇이 제자리를 찾아 습관처럼 돌아오니까.


그래, 다 아는데. 그래서 참아보려 하는데. 아직도 가끔씩은 약이 필요해. 오해는 마. 도망치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야. 덜 다치고 싶어서 먹는 거야. 약이란 건, 나약한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아픈 사람을 위한 거잖아.


우리의 머릿속엔 늘 가혹한 재판이 벌어지니까, 그걸 견디게 해 줄 수단이 하나쯤은 필요했을 뿐이야. 그게 다야.


사랑하는 나야, 그러니 너도 마냥 버티지 마. 넌 늘 혼자 참고 견디잖아.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약은커녕 물 한 모금 안 마시지. 물 한 모금, 찰나의 쪽잠. 무엇이든 좋으니 제발 너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마.






도망치는 사람은 합리화하고, 미화하고, 입을 다물어. 도망치지 못하는 사람은 의심하고, 판단하고, 질문하지. 도망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만큼만 행동하고.


과거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 차이를 고민해 보는 중이야. 우린 도망치는 사람이었을까, 도망치지 못한 사람이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해. 이젠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






난 걱정 마. 오늘은 제시간에 일어나고 식사도 잘 챙겼거든. 아, 약은 먹지 않았어. 오랜만에 나를 편안하게 내버려 둘 수 있을 것 같았어. 이 글 덕택인가 봐.


사실 나라고 정답을 아는 건 아니야. 말했듯 나 역시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중이거든.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때의 넌 어디까지 견뎠고 앞으로 나는 어디까지 버텨야 하는 건지, 무엇이 너와 내게 가장 좋은 길인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여전히 질문이 가득해. 아직 내가 저울질을 그만두지 못했다는 건 확실해 보여.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나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해서 미안해. 여전히 그늘진 상태인 것도.


너에게 염치없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적을 거야. 오늘 하루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멈추지 않은 하루로 마무리하고 싶거든.


끝을 선언하지도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지도 못한 채로 어설프게 이 자리를 버티고 있지만, 이 몇 줄의 글이 언젠가 나를 증명해줄 수 있을 거라 믿으니까.



수요일 연재
이전 11화장마보다 긴 우울이 내리는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