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경로

PART 02. 빛 없는 낮

by 홍사라

무언가 오래 머무른 자리에는 깊은 홈이 흔적으로 남고, 그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것이 고이며 머물러. 때가 오면 그 안에 고인 것들이 흐르기 시작해. 길게 패인 홈을 따르는 흐름은 새로운 길이 되고, 강줄기처럼 자리를 잡아.


우울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돼. 작은 틈새에 고여 있던 감정이, 홈을 따라 길을 내며 흘러 만들어지는 거야.


결국 우울의 본질은 감정이 아닌 경로야. 우울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의 약한 지점에 파고 들어 길을 내고, 그 길이 그 사람의 유일한 경로가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거든.


우리의 우울도 마찬가지야. 그건 아주 오래된 감정이고, 오랜 시간 같은 경로를 따라 흘러왔지. 가늠할 수 없고 기억도 나지 않는 아득한 언젠가부터, 지금까지.






우울은 목적지 없이 순환하는 경로를 좋아해. 힘든 상황을 끝낼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뿐이라는 생각과 함께 끝없이 같은 길을 걷게 만들지.


전부 우울증 치료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 깨달은 것들인데.


그 무렵엔 우울이 만든 경로와 습관을 차단하고 싶어 지더라. 우울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봤지. 확신은 없었지만 일단 나를 멈춰 세워야겠더라고. 그래서 회사를 정리하고 취미생활도 내려놨어. 여행도 떠나지 않았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혼자 시간을 보냈지.


그 상태에서 지난날을 돌아보곤 했어. 일기장을 꺼내 읽고, 사진 폴더를 열어 보고. 카카오톡의 지난 대화를 곱씹고, 그러다 추억을 공유할 만한 사람들에게 안부를 보내고. 이땐 이랬고 저땐 저랬던 기억을 헤집어 가며 시간을 보냈지. 새로운 길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발견하게 됐어.


예를 들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게 해 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너.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걸 확인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던 나. 존재를 지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착각했던 너와 나.


.... 어쩌면 목적지가 아니라 비상구를 찾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우리가 걸어온 이 길, 직선이 아니라 반복되는 나선이었어. 다시 보니 그렇더라.


나는 한때 늘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기분에 절망해 왔어. 완벽하지 못한 나를 타박했고. 그런데 한참 멈춰 서 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내가 있는 곳이 예전과 같은 자리가 아니더라.


같은 자리가 아니라 같은 풍경으로 돌아오는 거였어. 직선이 아닌 나선을 따라, 조금 더 높아진 시선으로, 넓어진 시야와 함께 걷고 순환하면서. 줄곧 그렇게 살아왔던 거야.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선, 죽음이 유일한 목적지라고 생각했던 그때의 내가, 깨진 유리 조각 같은 마음을 맨 발로 밟아가며 오르막을 걷고 있는 너의 모습이 보여. 그곳으로 돌아가 함께 걸어주지 못해 미안해. 나 또한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수가 없어.


대신 이 글을, 언젠가 이 자리에 도달하게 될 너에게 남기고 갈게. 상처 투성이가 된 채 도착한 너의 발이 잠시 이 글과 함께 쉬어 갈 수 있기를 바라.


모든 게 우울에서 시작됐어도 괜찮아. 그건 출발점일 뿐 목적지가 아니니까. 정점을 향해 오르다 보면 우리를 둘러싼 풍경도 바뀔 거야. 지금은 긴 여정의 일부를 걷고 있을 뿐이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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