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못하는 밤이 끝나갈 때

PART 02. 빛 없는 낮

by 홍사라

세상에서 가장 짧은 밤은, 잠들지 못하는 밤일 거야.


한숨도 못 잤는데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동이 트고 있거든. 기회도 주지 않고 창문가로 고개를 들이미는 아침, 그게 얼마나 야속한지.


수면제 없이 맞이하는 밤이 이런 식일 줄은 몰랐어. 지금도 이틀 넘게 깨어 있는 상태로 이 글을 쓰고 있어. 정확히 몇 시간째 깨어 있는 건지는 굳이 세어 보지 않았고. 그런 계산은 잠드는 데 아무 도움도 안 되니까.

복용 방식이 바뀐 게 가장 큰 원인일 거야. 네가 이 글을 쓸 시점이 되면 수면제를 비정기적으로 복용할 수 있을 만큼 우울이 완화되거든.


어쨌거나 긍정적인 변화지. 정해진 시간에 수면제를 성실하게 먹고도 잠들지 못하던 날도 있었으니까. 동시에 역설적이기도 하고. 우울이 완화되어 수면제를 줄였는데 정작 이전보다 더 잠들기가 어렵다니.






정신과 약이 삶을 덜 아프게 만들어주지는 않더라. 그 아픔이 삶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않게 도와줄 뿐. 고난과 고통을 없애주지도 않았어. 그것들에 압도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 줄 뿐이지.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이 줄어든다는 게 반가우면서도 기쁘지가 않았어. 보류해 둔 현실 문제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오랫동안 귓구멍을 막고 있던 귀마개를 빼낸 기분이라고 하면 네가 이해하기 쉬울까. 상상해 봐. 세상이 고요해진 게 아니라 내가 듣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고. 소음이 가득한 세계에서 자유로워진 게 아니라 단순히 보호받아 왔을 뿐이었던 거고. 달가운 일은 아니지.


감정을 느끼는 감각이 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약이 줄어든 걸 체감했어. 다행히도 치료를 시작하기 전처럼 무기력이나 허무를 느끼는 일은 없었어. 그렇다고 기쁨이나 의욕 같은 밝은 감정들로 주변이 가득 차는 것도 아니었지.


그보다는, 치료를 하는 동안 '아무렇지 않다'는 말로 뭉개놓을 수 있던 감정들에 하나씩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면서 현실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에 가까웠어.


생각의 흐름도 마찬가지였어. 약에 의해 잠시 멈춰 있던 사고들이 다시 예전처럼 이어지기 시작하더라. 지금까지의 시간을 곱씹고, 가정법으로 미래를 당겨 보기도 하고.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 자신을 인지해보기도 하고.


문제는, 끝내 답을 내지 못했던 질문들도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거야.


죽지 않길 잘했다는 게 섣부른 확신이었다면.

사라지는 게 정답이었다면.

아직 다 나은 게 아니었다면.

주치의 선생님이 잘못 안 거라면.

평생 약을 먹고살아야 할 팔자라면.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뭐, 이런 생각들인데. 이렇게 글로 적어 보니까 약간 하찮아 보이네. 부끄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새삼스럽고. 처음부터 우리의 우울은 줄곧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잖아?






협탁 위의 약 봉투 더미. 먼지가 가라앉은 빈 유리컵. 공백이 더 많은 일기장의 어느 페이지. 눈물 자국을 삼킨 얼굴. 잠들지 못하는 긴 밤.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는 수많은 질문들...


우울은 오래된 것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존재해. 새것인 상태가 아니라, 여러 번 접힌 흔적을 가진 낡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오래된 모습을 한 채, 처음부터 그게 우리의 삶이었던 양.


대부분의 오래된 것들의 운명은 둘 중 하나야. 완전히 버려지거나 낡고 헤진 상태로 남거나. 우울은 언제나 후자의 방식을 선택해 왔어. 오래된 것들 사이에 숨어 지내며 끝내 버려지지 않기 위해. 그래야 우리가 삶의 연약한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언제든 고개를 들 수 있을 테니까.






중요한 건, 언제나 그대로일 순 없다는 것. 지금껏 견뎌온 나도, 지금을 견디는 너도. 약 없이도 삶의 고통에 짓눌리지 않을 만큼,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그 최소한의 여백만큼은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


우울조차 예외일 순 없어. 우울감이 이전보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빨을 드러내는 이유는, 끝내 시달리다 며칠을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지독함은, 모두 이번엔 정말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우울 스스로 감지했기 때문일인지도 몰라. 흔히 말하는 명현현상,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사라지기 직전에 나타나는 마지막 발악 같은 게 아닐까.


무엇보다 나는 살아 있기로 한 선택을 더는 의심하고 싶지 않아. 견뎌 온 모든 시간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모든 감정들을 오롯이 나의 힘으로 마주 볼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잖아.


밤이 짧게 느껴질 만큼 괴로워도, 그 괴로움에 삼켜지진 않을 테니까.


보여? 머지않았어. 우리의 오래된 것이, 정말로 끝나가고 있어.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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