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찬란한 빛 아래에서

PART 02. 빛 없는 낮

by 홍사라

나는 지금 햇살이 환하게 스미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어.


유독 빛이 선명하고 맑은 날이야. 그래서인지 그림자도 오늘따라 길고 짙어. 빛과 그림자가 테이블 위에 진한 경계선을 두고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네. 노트북과 커피잔이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지 않았다면, 꿈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으려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빛의 반대말은 어둠이 아니라 그림자가 아닐까.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지잖아. 어쩌면 우린 어둠이 아닌 그림자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던 걸지도.


그게 너와 내게 우울을 안겨준 걸지도.






우울증 치료를 시작할 때 스스로 다짐했던 거 기억나?


치료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우울에 시달리고 있음을 밝히지 않기로, 아니 들키지 않기로 약속했었지.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다시 말해 완벽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일. 너에겐 그게 우울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었잖아.


여기까지 오느라 그동안 고생 많았어.


유일하게 너를 받아주었던 침대. 웃는 얼굴에 가려진 눈물 자국. “괜찮다”는 말 뒤에 숨긴, 괜찮지 않은 속마음. 우울을 들킬까 애써 주워섬기던, “걱정 마”라는 다정한 말. 약에 둔해진 감정이 날 상한 칼날처럼 생채기를 내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텼던 하루.


네가 얼마나 애썼는지, 나는 알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했었지. 이건 약점에 불과하고, 약점은 숨길수록 좋은 거라고. 차라리 죽을 때까지 비밀로 삼아 혼자 품고 가는 게 낫겠다 싶었어.


어느 시점부터 생각이 다시 바뀌더라. 치료를 받으면서 감정을 드러내고 확인하는 것에 너그러워진 덕분인 것 같아.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의문이 생겼거든.


나는 왜 약함을 이렇게까지 숨기려 애쓰고 있을까. 나약함을 가리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는 게 오히려 나를 약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차라리 나를 강하게 만들 대상을 찾는 데 에너지를 쏟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 대상이 없다면, 나 자신이 그 대상이 되어줄 순 없을까.


이 의문들이 나를 움직이게 하더라. 글을 쓸 수 있게 해줬고, 우울을 세상에 밝힐 용기를 심어줬지. 치료를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누구에게 우울증을 밝힐지는 어렵지 않게 정했는데, 정작 입을 열기가 힘들더라. 그들이 보일 반응을 너무 많이 상상해 본 탓이었어. 안쓰럽다는 시선, 지나친 연민, 가르치려는 말들, 예상치 못하게 번지는 소문, 나를 비웃는 모습들. 벌어지지도 않은 온갖 나쁜 상황을 죄다 떠올리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


우리는 늘 최악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치는 연습을 하잖아. 그 아픔에 익숙해질 때까지.


말을 꺼내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건 처음이었다. 눈물이 눈이 아닌 목으로 흘러나오는 느낌. 누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도 아닌데 호흡이 엉키고, 손이 자꾸 떨려서 테이블 아래로 숨기게 되고.


"우울증을 앓아 왔다"는 그 한마디가, 왜 그렇게 어렵고 무섭던지.


그렇게 막상 말을 꺼내고 나니, 오랜 각오와 연습이 무색해지더라.


누구도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고 잘못을 따지지 않았어. 그런 말을 하는 대신 함께 울어 주었어. 긴 말이 없이도 누군가를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지. 눈치채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사람도 있었어. 혼자 견디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없이 안아주었고, 손을 잡아주었고.


그래, 우리가 자신에게 단 한 번도 해준 적 없었던 것들이지.


왜 몰랐을까. 우린 이미 처음부터 밝은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리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어. 어제보다 유달리 맑은 햇살 아래에서.


사실은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


네가 서 있는 그곳, 어둠 속이 아니야. 너는 처음부터 찬란한 빛 아래 서 있었어. 빛의 찬란함에 그림자가 짙어졌을 뿐. 그걸 어둠으로 착각했던 거야.


일상에 존재하는 저 그림자는 매 순간 우리를 향해 찬란한 빛이 쏟아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 세상이 어두웠던 게 아니라, 잠시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야.


조금만 고개를 돌려 봐, 저 그림자 너머에 존재해.


빛이 너를 향해 쏟아지고 있어, 지금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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