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것들과 살아가는 법

PART 03.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by 홍사라

많은 것이 여전해.


자각 없는 자책. 자비 없는 잣대. 습관이 된 불면.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방식. 우울증 치료가 끝났지만 내면의 성질은 그대로야.


지나치게 자책 중이라는 걸 자각해 놓고서도 멈추지 못할 때도 있고. 우울증 치료가 끝난 만큼 더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잘 안돼서 답답하기도 하고. 쉬는 게 길어지는 이유를 그럴싸하게 설명하고 싶은데 손에 쥔 건 개뿔 없고. 남들도 다 버티며 사는데 나 혼자만 별 거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떤 것 같단 생각도 들고.


언제가 되어야 단단해질 수 있을까. 이제 완벽은 욕심내지 않을 생각이야. 완벽 위에 피는 꽃 대신, 불완전함 위로 자리 잡은 풀 한 줄기처럼 살아남고 싶어. 온전한 나로서, 뿌리 깊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언젠가 말했었지. 삶은, 이 길은, 직선이 아닌 반복되는 나선이라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게 아니라 같은 풍경이 보이는 자리로 돌아왔을 뿐, 나선을 따라 오르며 조금 더 높아진 시선과 넓어진 시야로 순환하는 거라고.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여전한들 뭐 어때, 잘 가고 있다는 증거인데.


무엇보다도 여전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사랑할 거라는 것, 사랑한다는 것.


우울증 치료가 끝나기 이전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대도. 예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하더라도. 다시 실패하더라도.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쥔 게 없어도. 매일 밤을 다시 지새운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너의 여전한 순간이 곧 나이기에, 앞으로도 나일 것이기에.





우울증 치료가 끝나도 삶이 달라지지는 않더라. 아니, 우울은 사라지지 않더라. ...이것마저 여전하다니.


삶이란 여전히 변곡점과 전환점으로 가득하고, 그 앞에서 우울은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나타나. 그건 익숙한 모습일 때도 있고 이전과는 다른 낯선 얼굴일 때도 있어.


결국 인정해야 해. 현대의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사라지지 않는 것을 끌어안고 살아야 해. 이 지독한 것은 우리 생이 끝나는 날까지 함께 하겠지. 살아가고 있는 한 계속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필연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우울의 결이 매번 달라진다는 것도 필연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한 가지 분명한 건, 더 이상 같은 자리에 멈춰 있지 않다는 것. 우울의 존재는 비록 여전해도, 그 결이 달라질 만큼은 앞으로 나아왔다는 것.


솔직히 말하면, 병원 다니고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버거워. 모든 순간이 처음 겪는 것처럼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져. 거울 속의 나, 내가 머무르는 공간, 키보드 위로 번지는 햇살... 전부 다 어긋난 듯한 위화감을 느껴.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더라. 어떻게 견뎠더라. 더 이상 그때처럼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방식은 더 이상 먹히지 않겠지.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할 것 같아.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생소하긴 해도 완전히 처음은 아닐 거야. 지금까지 삶의 여러 지점들을 지나고 또 넘어왔으니까. 새롭고 낯설게 느껴져도 사실은 동일한 연장선 위에 서 있는 거겠지.


감정 레이더가 예민한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종류의 감정을 경험한대. 우울도 예외가 아니겠지. 지금은, 최선을 다해 나를 다독이는 중이야.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다 보면 특정 감정을 깊게 경험하게 되기도 하는 거라고. 이번엔 우울의 차례일 뿐인 거라고.


감정에 예민하다는 것도 약점이라기보단 감정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봐. 많은 사람이 "기분이 나쁘다"거나 "기분이 안 좋다"는 말로 뭉개버리는 감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직접 경험하고 또 겪는 모든 과정에서 감정의 차이를 구분해 정확한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을 '우울에서 벗어나려는 단계'가 아니라 '우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경험하는 단계'라고 정의하고 싶어. 그래서 더 낯설고, 어쩌면 더 복잡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이 반복은 퇴행이 아니야. 패턴이 확장되는 과정인 거야. 힘들지만 의미 있는 반복이지. 우리는 나선으로 이어진 이 길을 그저 따라가면 돼. 그러면 언젠가 어디엔가 도달해 있을 거야.


마지막 바람은, 어디에 닿게 되든, 언젠가 그 어딘가에 도달하게 되든. 너는 여전히 너이기를. 나는 온전한 나이기를. 그때까지도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고 있기를. 지금처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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