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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지기 Oct 20. 2021

매염방을 아시나요?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며.

 매염방(Anita Mui)을 아시나요? 1980년대 홍콩영화를 좀 봤다 하는 사람이라면 성룡, 주윤발, 장국영을 비롯해서 4대 천왕이라고 불리던 유덕화, 장학우, 여명, 곽부성 등의 남자 배우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고 그들이 나오는 영화를 지나가면서라도 본 적 있을 거예요. 여자배우들이라면 국내에서 유명했던 왕조현, 장만옥뿐만 아니라 눈이 커서 예뻤던 관지림이나 청순했던 종초홍, 개성 강했던 임청하 같은 배우들도 기억날 거예요.

 매염방도 그들 중 하나였어요. 80년대 90년대, 홍콩영화가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에 코미디뿐만 아니라 액션과 멜로까지 섭렵하고 가수로도 한 획을 그은 배우 겸 가수. 남자는 장국영이요, 여자는 매염방이지요. 슬프게도 가장 친한 친구였던 매염방과 장국영은 2003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어요. 장국영은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하늘을 날다 죽을 때 마지막으로 땅에 내린 새가 되었고, 매염방은 해를 하루를 남기고 12월 30일 진짜 별이 되어 가장 친했던 친구 곁으로 떠났어요. 아직도 일부에서는 장국영은 동성연애자가 아니라 진짜 연인은 매염방이었다는 이야기들을 하죠. 무대 위의 두 사람을 보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무대 위의 장국영과 매염방

 제가 처음 봤던 둘의 영화는 연분(緣份, 1984)이었어요. 포스터에는 너무 앳된 장만옥과 장국영의 모습이 보이죠. 매염방은 이 영화에서 실제 자신과 꼭 닮은, 장국영을 좋아하지만 여사친으로 남는 역할을 연기해요. 제가 그동안 보지 못한 가장 쿨하고 멋진 서브 여주였어요.

연분(緣份, 1984), 장국영, 장만옥, 매염방 주연

슬프게도 두 사람이 같이 출연한 영화들은 장국영과 매염방이 세상이 떠난 다음 해 하늘로 간 친구 소영이랑 항상 같이 봤었어요. 생각해보니 비슷한 시기에 제가 사랑했던 세명을 잃었네요. <연분>을 보고 나서 소영이는 장만옥의 책받침을 모았고 저는 매염방의 책받침을 샀어요. 매염방을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인기는 많지 않았는지 책받침이나 브로마이드의 종류가 많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그 당시에는 한국 배우보다 홍콩 배우들이 더 유명하고 홍콩 영화가 더 세계적으로 유명할 때라 팬시용품점에 가면 꼭 매염방 사진은 하나씩 있어서 중복되지만 않으면 사서 벽에도 붙이고 책상에도 붙이고 그랬어요. 엄마는 제 방을 열 때마다 벽에 붙어 있던 홍콩 배우들 사진을 보면서 한숨을 쉬면서 돈지랄이라고 잔소리를 하시곤 했어요. 그 사진들의 중심에는 매염방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1987년 영화인 <연지구>를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서 역시 소영이랑 같이 봤어요. 아마 92년이나 93년 정도였을 거예요. <연지구>는 19금 비디오예요. 예전에는 비디오테이프에 빨간색 띠가 둘러져 있었어요. 당시 비디오테이프는 요즘처럼 7,12,15세 나이로 구분하지 않고 노란색 띠, 초록색 띠, 빨간색 띠로 구분했어요. 노란색 띠는 전체 관람가, 초록색 띠는 청소년 관람가, 빨간색 띠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의미했어요. <연지구>는 야한 장면이 나온다기보다는 주인공들이 아편에 취하는 내용이나 음독자살하는 내용이 있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지금 같으면 15세 관람가 정도 될 영화예요.

 우리가 자주 가던 동네 비디오 대여점은 젊은 아줌마 아저씨가 운영하고 있었어요. 무뚝뚝한 아저씨는 띠 색깔로만 구분해서 빨간 띠가 둘러진 것은 절대 안 빌려주는데, 같은 홍콩 영화 팬이었던 주인아줌마는 자신이 보고 문제없다 싶었던 것을 빌려주곤 했어요. 그때도 아줌마가 어디서 얻었다는 <연지구>의 한 장면이 담긴 사진 한 장을 선물로 주면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줬어요.


연지구(胭脂扣, Rouge, 1987) 포스터

 


 신문사에서 근무하는 원영정은 구인광고를 하러 온 한 여자, 연화를 만난다. 원영정과 그의 연인인 초연은 서늘한 느낌의 연화가 귀신이라는 것을 알지만 사람 찾는 것을 도와준다.

3811, 그곳에서 기다립니다. - 연화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그녀가 찾는 십이공자 진진방 도련님은 나타나지 않고, 원영정과 초연은 오래된 기사에서 연화와 진진방의 동반 음독자살 기사를 찾아내고, 연화가 숨겼던 진실도 알게 된다. 사실은 동반 자살이 아니라 현실에 부딪혀서 다 포기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는 진진방에게 아편을 먹이고 동반자살을 시도한 사건이었고, 결과는 연화만 죽고 진진방은 살아남아서 원래 정혼자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연화는 그 사실을 모르고 50년이 넘게 저승에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53년 동안 간직했던 연지합을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이젠 기다리지 않겠어요.


 초라한 노인이 된 도련님을 만나고 나서야 연화는 사랑했던 이의 나약했던 모습을 확인하고 그간 기다린 세월의 허무함을 느끼면서 돌아간다.


연지구(胭脂扣, Rouge, 1987)

 

 영화가 끝나고 나와 소영이는 한참을 울었어요. 떠나면서 미련을 버리고 희미하게 웃는 연화의 미소도, 연화를 보고 책임지지 못한 사랑에 울부짖는 십이공자의 모습도 가슴 아팠기 때문이겠죠. 제 마음속에는 <연분>에서 보았던 세상 쿨한 여사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장 슬픈 미소를 던지는 연화만 남아있었죠. 그 미소는 지금도 매염방을 기억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예요.

 이후에 매염방은 다작은 아니지만 주성치와 코미디 영화도 찍고, 성룡과 함께 액션 영화에 출연하지만 다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제 머릿속에 남은 연지구에서의 연화의 모습을 지우지는 못했어요.

 그러다가 영화와는 다른 매염방 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콘서트를 봤어요. 지금은 youtube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로 콘서트 영상을 보지만 90년대 초까지도 유명한 홍콩 가수들의 콘서트 영상이 해적판 비디오로 많이 떠돌았어요. 진짜 유명한 가수들은 비디오로 출시되기도 했고요. 매염방의 콘서트 영상도 그런 비디오로 봤어요. 이미 매염방 테이프를 사서 늘어지게 듣고 있던 터라 듣기만 하던 노래의 실제 무대 위 모습을 보니 나도 소영이도 너무 신났었죠. 중국어 가사를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적어가면서 따라 부르고 외웠어요. 언젠가는 진짜 콘서트를 보러 홍콩으로 가리라 약속도 했었죠. 한동안 홍콩 무협드라마를 보면서 매염방이 부른 주제가가 나오면 따로 녹음해서 듣기도 했고요. 그렇게 제 사춘기의 많은 시간을 채워주었네요.

 


 

 며칠 전 샹치의 홍보 영상을 보다가 양조위의 인터뷰를 보았어요. 그러다가 문득 양조위와 매염방이 함께 불렀던 의천도룡기 1986의 OST가 생각나서 혹시나 하며 youtube를 찾아봤더니 세상에! 그 무협물의 오프닝 영상이 있지 않겠어요! 양조위와 매염방의 목소리가 담겨서요.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매염방의 미소가 너무 보고 싶어졌어요. 아마 매염방만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떠나간 친구도 보고 싶고 아무 고민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덕질하던 시간들이 그리운 거겠죠.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매염방의 노래를 BGM 삼아서 하루를 보내야겠어요. 


我想你。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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