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선 Jan 06. 2022

나에게 힘을 주는 음식

사랑 한 스푼, 칭찬 한 스푼, 감사 한 스푼   

"1년간 기억에 남거나 나를 기쁘게 했던 음식은 무엇인가요?"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열린 독서 모임에서는 그림책 테라피스트 C가 다른 회원들을 위해서 특별히 그림책 테라피를 진행했다. <오감>을 주제로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미각>의 차례가 되었을 때 C는 음식에 관한 그림책을 읽어주고 지난 일 년을 보내면서 기억에 남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다른 이가 만들어 준 정이 담긴 맛있는 반찬 이야기도 있었고 정말 오랜만에 먹은 엄마의 시그니처 음식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각자 올 한 해 내 배를 부르게 하고, 마음을 채워준 음식 이야기로 쉼이 없었다. 그리고 차례가 왔을 때, 난 망설임 없이 "카레"라고 대답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만든 카레를 정말 좋아한다. "무얼 만들어 줄까?"라고 가족들에게 물으면 열에 일곱은 '카레'라고 말한다.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음식이다. 양파와 감자, 당근과 오뚜기의 고형 카레가 들어간다. 완전한 채식 카레다. 가끔은 시판 또띠야를 살짝 구워 난처럼 찍어먹기도 하지만 보통은 밥에 듬뿍 부어서 김치를 얹어서 먹는다. 냉장고 속에 양파나 감자, 당근은 항상 있으니 반찬도 없고 입맛도 없을 때 이처럼 후딱 만들어 낼 수 있는 음식은 드물다.

 내가 카레를 최고의 음식으로 꼽은 이유는 만들기가 쉬운 탓도 있겠지만 오목한 접시에 밥과 카레를 담아서 상에 올려놓으면 식구들이 한입씩 먹으면서 보통 때 보다 과하게 꼭 한 마디씩 하기 때문이다.


"야~ 너네 엄마는 카레를 어쩜 이렇게 맛있게 만드니? 너네 엄마 카레가 최고다. "

남편은 그러면서 주방에서 밥과 카레를 더 담아온다.


"엄마,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카레를 이렇게 맛있게 만드는 거야?"

 둘째 영이는 애교 섞인 원망 투의 칭찬을 연발한다.


"......"

 간지러운 말을 하면 오그라들거라 믿는 사춘기 은이는 '음~' 이라며 맛있는 소리를 내면서 제일 먼저 다 먹고 밥알 한 톨 남지 않은 접시를 내 보인다.


 혹시 시판 고형 카레에 다정 소스라도 들어있나? '가족들을 맛있는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라는 예쁜 마음이 아니라 밥하기도 귀찮고 만사 짜증 날 때 얼른 해치우려고 냉장고 속의 야채들만 가지고 만들 때가 더 많은데, 그 음식을 먹고 가족들이 보내는 간지러운 칭찬들은 만들 때의 기분이 어땠던지 간에 식사 후에는 '내가 참 잘했네'라는 기분이 들게 한다. 코로나 시대에 집에서 밥 먹는 시간이 많으니 가족들이 좋아하면서 만들기 간단한 음식을 만들 때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카레는 식탁에 자주 올라오는 메뉴가 되었다. 그리고 식탁에 올라올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내 어깨 뽕은 한계치까지 상승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카레는 아이들이 회사 어린이 집을 다니던 시절부터 우리 집의 단골 메뉴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주말부부에 독박 육아를 하던 시절, 저녁 7시가 넘어 회사 어린이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서 놀고 있던 두 딸을 찾아서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들을 종종 웃겨주던 메뉴가 카레였다. 오래된 사진들을 보니 나름 많이 고민했었나 보다. 야채를 어떻게 하면 많이 먹일지, 짧은 시간에 준비해서 빨리 먹일 수 있는 메뉴가 무엇인지, 아이들을 재밌게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서 메뉴를 정했었다. 카레 넣고 볶음밥 만들어서 강아지를 만들기도 하고, 카레 호수에 오리를 띄워보기도 하고, 카레탕에 목욕 중인 베이맥스를 만들어보기도 했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면서 맛있게 먹었다. 혹시 그 시절의 정성과 두 딸의 웃음에 기뻐하던 엄마를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카레탕에서 목욕 중인 짝퉁 베이맥스(2015, 골방지기)

 

 한해 한해 나이 들어가면서 사춘기 아이들과 부딪혀서, 남편과 아이들이 내 맘을 몰라줘서, 혹은 아침부터 아무 이유 없이 만사가 귀찮고 우울해질 때가 있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앞머리에 하얗게 쌓여버린 세월이 보여서 슬퍼질 때도 있다. 그렇게 바닥으로 가라앉는 날, 아이들과 남편이 먼저 알아채고 카레를 해달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집에 있는 야채를 도마에 얹고 칼질을 하고 볶고 끓여서 식사를 준비한다. 요리를 하는 동안 나는 기분 좋은 소음은 머릿속을 비우고, 의식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칭찬과 감사는 다시 에너지가 되어 가라앉은 나를 끌어올린다. 어쨌든 카레 식사가 끝나고 나면 서글픔이나 우울감 따위는 잊고 다시 어깨를 한껏 세운다.

 

 또 받았으니 돌려줘야지. 칼퇴는 했지만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생토마토 주스를 한잔, 웬일로 꼭 안아주는 큰딸 은이에게 감사 인사를, 한껏 애교 부리는 막내에게 잔뜩 뽀뽀를 돌려준다. 이렇게 서로서로 감사하고 칭찬하다 보면 아이들의 사춘기도, 나와 남편의 갱년기도 조금은 덜 뾰족하게 지나가지 않을까?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한번 해보시길. 너무나 익숙한 곁에 있는 이에게 칭찬 한마디, 감사 한마디.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도, 잘 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