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사실 아버님이 어제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어젠 상태가 확실하지 않았어요. 그래서이제 연락드려요."
어젯밤, 동서는 우리 집으로 택배를 하나 보냈다는 연락을 하면서 통화가 끝날 무렵 조심스럽게 소식을 전했다. 시동생네는 아버님이 살고 계시는 군산의 옆 도시에서 살고 있다.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훨씬 가깝다. 거기에다가 아버님이 다니시는 병원이 그곳에 있어서 갑자기 몸이 불편해져서 응급실로 가야 할 상황이 생기면 가까운 시동생에게 먼저 연락을 하셨다. 어제도 그랬다.
아버님은 1941년에 태어나셨고, 올해 우리 나이로는 83세가 되셨다. 6.25를 겪으셨고, 친척 이모가 공산당에게 처형당하는 것을 보셨다.평생 공부만 해오셨고 아직까지 당신이 배우고 해 오시던 일을 계속하고 계신다. 쉬는 시간이 생기면 글을 쓰시고,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신다. 연휴에는 교회의 비슷한 연배의 은퇴장로님들과 여기저기 소풍을 다니신다. 나름 꽉 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다행히도.
12년 전 어머니가 혈액암 진단을 받자마자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 가족모두가 황망 중에 어머님을 보내드렸고, 장례식이 끝나고서야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을 실감하고 가족들이 모여 눈물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장례를 치른 후 형제들의 가장 큰 고민은 아버님이었다.
어머님은 활동적이고 대외활동이 많으신 분이었다. 아버님에게 바깥 사회와의 고리는 대부분 어머님이셨다. 아버님은 일주일 내내 아침에 집에 딸려있는 일터로 출근하시고, 저녁에는 몇 걸음 걸어 퇴근하셨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하루를 보내셨다. 그러다 보니 만나시는 친구도 많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아버님의 친구는 대학동창이자 동기간이 되어버린 막내 이모부님 뿐이었다. 반면에 어머님은 친구도 많으셨고 남편의 유치원 자모회, 여전도회, 간호사 시절 친구들 등등 여러 모임에 속해 계셨다. 그만큼 활발하게 다양한 대외활동을 하셨다. 그런데 그런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었다.
많은 것을 의지하던 배우자가 갑자기 사망했을 때 들이닥친다는 상실감이 아버님을 휘덮을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우리 가족은 한동안 군산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출산휴가를 마치고 복귀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이제 우리는 결정을 했야 했다. 남편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중이어서 돈벌이는 나의 몫이었다. 육아휴직은 꿈도 못 꾸는 카드였다. 남편의 학교는 대전, 나의 직장은 서울이라 주말부부를 피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은이는 어린이집에 맡겨야 했다.
그때 남편은 혼자 계실 아버지도 걱정되고, 100일도 안돼서 어린이집을 전전해야 할 은이도 걱정되니 대전의 자취방을 정리하고 군산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겠다고 했다. 군산 집에는 어머님이 편찮으실 때부터 살림을 도와주시던 권사님이 계셨고, 아버님의 직장은 집과 같은 건물이고, 남편도 출퇴근이라고는 하지만 실험을 하거나 강의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재택근무를 해도 무방했다. 당연히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그때의 나는 아버님에 대한 걱정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조금 더 편하게 아이를 키우고자 하는 이기심이 더 컸었다.
그러나 막상 두 남자가 갓난쟁이를 키우면서 닥칠 앞날은, 아무리 도와주는 분이 계시고 내가 주말에 아이를 맡아서 돌본다고 해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끊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남편은 거의 매일 대전으로 출근을 했고, 낮에는 아버님과 권사님이 은이를 주로 돌보셨다. 그러나 권사님은 살림도 같이 하다 보니 자유롭게 오고 가는 아버님이 은이를 돌볼 때가 많았다. 갓 60일이 넘은 아이는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유축해둔 모유와 분유를 병행해가면서 먹이고, 기저귀도 아이가 불편하지 않게 계속 확인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버님은 내가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다른 곳에 신경 쓸 틈 없이 오롯이 은이한테만 집중하셨다. 주중에 아이가 갑자기 아프면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도 아버님의 몫이었다. 은이를 위해서 틈틈이 소아과 공부를 하셨고 은이의 표정을 보면 뭐가 필요한지 아셨고, 누구보다 기저귀도 잘 갈고, 분유도 잘 타셨다. 그렇게 1년이 흘렸다.
일 년 사이 아버님은 표정은 훨씬 밝아졌다. 거짓말을 아주 약간 보탠다면 은이를 자랑하려고 사람을 만나셨다. 그만큼 온통 은이만 신경 쓰고 계셨다. 그리고 첫 번째 기일이 돌아왔다.
형제, 친구, 권사님들까지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추도식이 열렸다.
"제가 사실 은이 덕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떠났을 때 나도 세상을 잃었습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있던 꼬물거리던 은이를 챙기다 보니 다시 희망이 생겼고, 상실감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
아버님은 은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추도사를 시작하셨다.
옥춘당 (고정순, 2022) - 출처:알라딘
며칠 전 <옥춘당(고정순,2022)>을 읽었다. 전쟁 피난민으로 만나서 평생을 살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말을 잃고 삶을 잃은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할아버지가 입안에 넣어주던 옥춘당을 잊지 못하는 할머니는 10년은 말을 잃은 채 무기력하게, 다음 10년은 치매로 요양소에서 지내다 돌아가셨다. 책을 읽으면서 오롯이 할아버지의 사랑에 기대어 살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끝까지 혼자 남을 배우자를 걱정하며 떠난 할아버지와 오랜 시간 아무런 희망 없이 조금씩 영혼이 빠져나가는 할머니를 보면서 아버님과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은이덕에 살았다고 하는 아버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시작은 우리 부부의 이기심에 약간의 걱정을 보탠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어머님이 떠난 상실의 시간을 은이와의 추억의 시간으로 채우고 계셨다. 그리고 은이도 우리도 아버님과의 추억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옥춘당의 기억처럼.
옥춘당 (고정순, 2022) - 출처:알라딘
"난 괜찮다. 배가 아직 조금 아프긴 한데, 약 먹으면 좋아질 것이니, 회사 갔다가 퇴원할 때나 와서 도와줘."
오후가 되어야 아버님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환자 보호자로 등록하기 위해서 남편은 PCR 검사를 받고 왔다. 아마 주말 내내 남편은 병원에 머물 것이고, 아버님은 별 탈 없이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실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옆으로 돌아가겠지만 아버님은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시면 좋겠다.
"아버님. 얼른 회복하시고 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어머님이 기다리시겠지만 저희랑 조금 더 오래 있어주세요. 더 많은 아버님에 대한 기억으로 꽉꽉 채운 뒤에 아버님이 떠나시고 난 빈자리, 그 기억들을 곶감 빼먹듯 하나씩 하나씩 꺼내면서 채울 수 있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