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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May 21. 2022

인간다움을 지킨다는 것

'진화 신화(김보영 소설)'을 읽고


 한 번도 인간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는 개구리나 도마뱀, 또는 개미 따위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데미안> 중에서

 

 김보영 작가는 <데미안>의 서문에 있는 문장에서 소설 <진화 신화>(김보영, 2010)의 첫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진화와 신화라는 단어의 상충되는 느낌이 호기심을 불렀고, 드디어 얼마 전에 지인에게서 책을 빌렸다. 마찬가지로 고대사의 한 줄의 기록에서 시작된 <바람의 나라>(김진)처럼 역사 판타지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고대사에 진화론 한 스푼 듬뿍 떠서 양념한, 그런 맛깔난 SF소설이었다.

7년 여름 4월, 왕이 고인 연못에 가서 낚시를 하다가 붉은 날개를 단 하얀 물고기를 낚았다.
25년 겨울 10월 , 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53년 봄 정월, 부여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빛깔은 환하고, 꼬리가 없었다.
55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자줏빛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그 표범의 꼬리가 아홉 척이었다.
<'삼국사기 중 고구려본기-6대 태조대왕 실록'중에서>

 책의 도입부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태조대왕 실록'을 소개하고 있다. 낯선 삼국시대의 모습을 기록하는 책(물론 1100년도 훨씬 지난 고려시대에 쓰인 것이니 이것 또한 전승되어온 전설의 기록일 테지만)에서는 <신기한 동물사전>에 등재될 만한 환상의 동물들이 등장 헸다.

 기록상의 태조대왕은 97년간 집권하였고 100세가 넘어서 동생의 반란으로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사망한 왕이다. 자식들은 모두 동생에 의해 살해당했다. 소설에서는 살해당한 큰 아들을 살려서 이야기의 중심에 데려다 놓았다. 새롭게 기록한 고구려는 신체의 진화나 퇴화의 기간이 짧아서 어떻게 사느냐 혹은 어떻게 살길 원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고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왕이 된 숙부가 보내는 자객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밤에만 돌아다니고 숨어 지내던 왕자 막근은 숨어 지내기 좋게 몸이 변화하는데, 이야기 내내 살고 싶고 사람들에게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은 욕망을 드러낸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인간다움을 지키려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추한 모습으로 죽어가는지 누누이 강조하셨다. 인간의 형상으로 죽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 <진화 신화> 중에서


 막근은 자객을 피해 도망치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서 피난 중인 사람들도 만나고, 사람의 말을 하는 호랑이도 만났다. 부모님이 주신 몸을 잃고 축생의 모습이 된 호랑이를 가여워하지만 호랑이는 막근에게 되물었다.

"본연의 모습이란 무엇이냐?"
(중략)
"나는 내 손으로 내 배를 채울 것을 구하며 살기를 원했고 이런 모습을 갖게 되었다. "
(중략)
"하나의 종이 그 형태를 변화시키는 데 아득한 시간이 걸렸던 시대를 아느냐. 종의 분화가 일어나는 데에 수만 년씩 걸렸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가 지금보다 못한 시절도 아니었다. 그저 그 시절에는 그런 방식의 적응이 필요했을 뿐이다. 자연은 선악과 우열의 가치판단 없이 생존 방식을 결정한다. 인간의 표현 형질은 자연이 택한 생존의 한 방편일 뿐이다." - <진화 신화> 중에서

스스로 배를 채우며 살길 원했던 호랑이처럼 본연의 모습은 내가 간절히 원하고 소망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좋아하는 영화 중에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라는 판타지 영화가 있었다. 잘생긴 강동원이 전우치 역을 맡아 도술을 부리고 단군의 신물로 알려진 천부인(혹은 천부삼인(天符三印))을 모으기 위해 애를 쓰며, 만파식적을 차지하려는 요괴랑 싸워 이기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천부인중 하나가 청동거울이다. 영화에서는 청동거울을 보면 나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설정했다. 그래서 남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암컷 개 일수도 있고 젊은 여성의 모습이지만 거울 속에서는 늙은 선인의 모습이기도 했다.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영화 속 청동거울이 떠올랐다. 비록 겉으로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만약 청동거울에 나를 비춘다면 어떤 모습일까?

 

 인간은 난자와 정자가 수정이 되고나서부터 죽어서 세포 활동이 멈출 때까지 쉬지 않고 변화한다. 두 개의 생식세포가 만나서 수정을 하고 끊임없는 분열을 하면서 점차 태아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배 속에서는 물론 태어나는 순간에도 계속 자란다. 갓난아기의 모습이었던 인간의 외양은 점점 털이 자라고 살이 붙고 뇌세포가 발달하면서, 어떤 때는 느리게 어느 때는 빠르게 계속 변화한다. 결국 본연의 모습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 형질로*는 표현할 수 없다. 아마도 청동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나의 내면 속에 숨겨진, 죽을 때까지도 간절하게 찾기를 바라는 본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요즘 뉴스를 보고 있으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청동 거울로 비춰본다면 인간의 형상은 아닐 것 같은 존재들의 소식이 종종 들린다. 어떤 권력자는 다른 이들의 소리를 듣지 않고 내 친한 세력만 옆에 두다 보니 귀는 계속 작아져서 구멍만 남고, 멀리 떨어진 이를 손잡아주지도 않으니 팔의 기능은 퇴화되어 어깨에 손만 달린 형상이 아닐까? 어떤 이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대서 입만 커다랗게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사람은 부정한 일에도 침묵으로 일관하여 스스로 돌이 되길 원한 것 같다. 어린 아이나 여성 같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을 죽이거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며 괴롭히는 것들은 거울에 어떻게 비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TV 뉴스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궁금해졌다.

 

그러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어떻게 늙어갈까? 마지막 세포의 활동이 멈추는 순간 나의 본연의 모습은 거울에 어떻게 비칠까?


 내가 가진 욕심들에 휩쓸려서 변해버린 흉측한 모습도 떠오르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이 드러난 모습도 상상했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은 권력이나 부(富) 같은 인간의 욕망으로 점철된 것을 갈망하지 않으며, 더 낮은 곳에 나를 두고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주위를 살피는 것인데,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과연 욕심을 버리고 살 수 있을까?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낮은 곳에 둘 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까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막근의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무한 노력을 해야 한다. 욕심을 버리기 위해 항상 다짐하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쉬지 않고 고민해야 한다. 수많은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생각은 깨어있어야 하며, 끊임없는 노력을 해서 인간다움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세포의 모든 활동이 멈출 때 내 본연의 모습을 떳떳하게 마주 보자. 그리고 거울에 비친, 치열하게 지켜낸 인간의 모습이 멋있다고 말해주어야겠다. 나의 마지막 순간에 말이다.






*표현 형질(=발현 형질) : 생명학에서, 생명체가 유전적인 정보를 이용하여, 세포, 조직 및 개체에 단백질과 당을 통해 생산한 기능적 형질을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유전자와 환경적인 요인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이다. 유전형질과 비교되는 말이다. (출처 : 위키백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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