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n who read the book for me.
조용한 카페에 앉아 창 밖으로 비 내리는 걸 보면 좋을 것 같아 서둘러 닉에게 전화를 했다.
가고 싶었던 카페로 이동하던 길에 '나 예전에 비 별로 안 좋아했던 거 기억나?'라는 나의 물음에 웃으며 고갤 끄덕이는 그.
꿉꿉하고 머리가 축 - 더불어 기분까지 눌러버리는 비의 기운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기다 곱슬곱슬 거리는 머리가 비를 만나 더욱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는 게 싫기도 했지, 피할 수 없다면 나에게 '우산'은 무조건 정말 무조건 이었다.
그런 내가, 어느 순간부터 비가 싫지 않더니 이제는 좋아지는 날이 더 많아졌다.
후드득후드득 - 바람과 함께 무섭게 내리던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집에 함께 가던 날도 있었고,
둘이 마트를 가는 날이면 그렇게 자주 비가 내려 '대체 누가 비를 몰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며 장난치던 날도 있었다.
우산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맞으면 좀 어때, 라며 내가 먼저 빗속으로 들어가기도 했었네.
나도 모르게 인상부터 찌푸리던 내가 이젠 비 올 것 같으니 데이트 하자며 그를 불러낸 것도 정말 큰 변화가 아닐까.
물론, 지금처럼 미세먼지에 좋지 않은 공기들이 엉켜 있는 한국에선 비 맞는 게 꺼려지지만 그땐 그랬다.
그렇게 예전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카페에서는 둘이 나란히 앉아 맛 좋은 와플과 커피를 나누는데
창 밖으로 몇 방울씩 톡톡톡 비가 내린다.
카페 한 곳에 놓여 있던 책들 중, 서로 맘에 드는 책을 골라놓고는 랜덤으로 책을 펼쳐, 펼쳐진 페이지의 내용을 서로 읽어줄까? 했는데 그때 닉이 시집을 들었다.
그것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시집 한 권을.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익숙한 호흡과 목소리였는데 왜 그날은 그렇게 달리 들리고 달리 보였는지.
아주 오랜만에 그가 시를 읽어주었다.
같이 공감하다 또 다르게 각자 해석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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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진 자리에서 곧
사라졌고 나는 너머를 생각했으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헤매고 낯익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시간과 공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잔상들을 웃자라게 했으므로 근처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
<우리들의 천국> 전문,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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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아이들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겸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장마-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전문, p48
카페에서 나오니 더 올 것 같던 비는 오지 않고,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밤은 또 금세 찾아왔다.
달콤 쌉쌀한 연애 참 좋지만, 헤어지는 건 항상 아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