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결심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나 혼자, 친구들과 다른 학교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비웃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니까.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평준화가 막 시작되던 라떼는.. 주민등록번호로 입학자를 추첨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 번호는 16지망 중 15지망의 학교에 선택됐다. 눈앞에 보이는 5분 거리의 학교를 두고, 나 홀로 머나먼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은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며칠을 울며불며 난리 친 끝에 자퇴 허락을 받아냈다. 단, '입학 한 달 뒤 자퇴할 것'이라는 조건과 함께.
지금 떠든 사람, 너. 네가 임시 반장해
그런데 그만, 입학식 날 반장이 되고 말았다. 임시직이었지만 그 자리는 내게 처음으로 '책임감'을 알려준 자리이기도 했다. 교과목마다 일어나 인사를 하고, 친구들의 서류를 챙기는 일. 그런 일상의 행위들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2주 뒤, 나는 정식 반장이 됐고 '자퇴'라는 말은 더 이상 내 입에 오르지 않았다.
그 우연을 시작해 주신 담임 선생님은 20대 초임 선생님이셨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이름을 알리셨지만, 모두가 선생님을 좋아했다.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의 책임과 경계를 늘 명확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야자를 땡땡이치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지만,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는 축구공 하나 들고 운동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 공부는 못해도 괜찮았지만, 싸가지는 없으면 안 됐다. 특히 나는 더욱 선생님을 잘 따랐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계기가 있었다.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나는 공부와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중학생 때는 뒤에 딱 3명이 남았던 적도 있을 정도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처음 정식 반장이 됐을 때 다른 선생님께서 내 자질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까지 내가 주변 어른들께 듣던 말은 늘 노력과 최선이었다. "머리는 좋은 데 노력을 안 해서 그래" 나는 이 말이 정말 싫었다. 머리가 좋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해 본 적 없다. 그래서 그것이 내게는 부당한 강요로만 느껴졌다.
너는 뭐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마.
집에 가서 할 필요도 없어. 학교에서만 해.
그랬던 내게 처음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셨다. 아직도 그 이야기를 나눴던 교무실 풍경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선생님은 내 입학 성적표를 보고 계셨다. 분명 처참했을 것이다.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더 당황한 것은 내 쪽이었다. '진짜 열심히 안 해도 되나...' 확신에 찬 선생님의 목소리가 주눅 들었던 내 마음을 녹여주었다. 무엇보다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다. 정말, 기뻤다.
그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아, 학교에 앉아 있는 것부터 연습을 했다. 성적은 점차 올랐고 반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등수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는 교단 위에 올라가 대표로 상장을 받았다. 3년간 내리 반장을 맡은 유일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대학을 갈 수 있었고, 그 덕에 원하는 일을 찾아 취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인생의 모든 꼭짓점들이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잠시 연락이 끊겼던 시기도 있었지만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제는 만나면 함께 맥주를 마신다. 사제지간을 넘어선 인생의 선배가 되었고, 멋진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다. 함께 나이들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다.
나는, 잘 살 것이다. 멋진 사람이 될 것이다.
은인과도 다름없는 선생님의 멋진 거울이 되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선생님의 자부심 넘치는 첫번째 제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