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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야 Oct 08. 2021

초록 밥이 잘못했네, 초록 밥이 잘못했어

예민한 아이, 불안한 엄마


① 물에 한 번 데친 시금치를 우유와 함께 믹서에 넣고 곱게 갈아 준다

② 달군 팬에 버터와 양파를 넣고 볶다 잘게 썰은 고구마를 넣어 익힌다

③ ①번의 시금치 우유를 팬에 넣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밥을 넣는다

④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치즈 한 장 올려주면 끝!



"이건 우리 집 필승 메뉴야!"


 유아식을 시작했을 때부터 아이가 한결 같이 잘 먹던 메뉴가 바로 [시금치 리소토]다. 식재료도 흔하고 조리법도 간단해 주에 한두 번은 꼭 만들어 줬던 것 같다. 무엇보다 '밥 씨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좋았고!


 그러다 최근 몇 달간 시금치를 식탁 위에 올리지 못했다. 장 보는 곳을 집 앞의 유기농 매장으로 바꿨는데, 그때그때 소량의 제철 채소만 나오다 보니 여름 내 시금치를 볼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 모처럼 시금치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집어왔는데, 우리 집 필승 메뉴가 눈물의 음식이 될 줄이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거 아니야"

"너 맨날 먹던 거잖아. 좋아하던 거! 기억 안 나? 여기 치즈도 들어가고, 우유도 들어갔는데?"


정말이지, 아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치즈도, 우유도, 버터도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배고프다고 설쳐대던 아이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식탁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찬장에서 소면을 꺼내 '후루룩 후루룩' 흉내를 내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이와 똑같이 고개를 내저으며 손에 쥔 수저에 초록빛 리소토를 한가득 올려 내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이 눈에서 또르륵 눈물이 흘렀다.


"일단 한 번 먹어봐, 그런 뒤에 싫으면 뱉어도 괜찮아."


어디선가 보았던 오은영 박사님의 멘트를 그대로 따라 말했다.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하게. 그래도 아이의 대쪽 같은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타협이란 게 없었다. '오박사 님, 얘는 안될 것 같아요' 마음속에 흩어져 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한 곳에 모여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침 퇴근한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일이냐 물었다. 내 편이 생겼다는 자만 때문일까? 혹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더 단호한 태도로 아이를 대했다. 멀리서 달려오던 기차가 마침내 역에 이르렀을 때처럼 목소리를 점차 높였다. 아이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연신 '쉿! 쉿!'하고 외치면서도 끝까지 초록 밥을 거부했다.


어릴 때 아이와 먹는 것으로 실랑이를 심하게 하면, 아이 성격이 나빠진다.
먹는 것으로 아이와 실랑이를 하는 것은 여러모로 손해가 많은 일이다.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 중에서


"김에 싸줄까? 치즈 올려 줄까? 잣이랑 같이 먹을래? 콩가루 뿌려줄까?"


남편이 아이를 안아 살살 달랬다. 밥 씨름을 할 때마다 썼던 모든 필살기를 다 동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거부 반응만 더 격렬해질 뿐이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냥 흰밥을 주었을 것이다. 계란 프라이 하나 급히 부쳐 간장에 비벼 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새로운 것도 안 먹으면서, 먹던 것까지 안 먹으면 나중에는 진짜 맨밥만 먹게 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마음에 피어오르자, 나도 모르게 버럭 아이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주르륵주르륵 으아아 앙. 싫어 싫어. 안 먹어"


대체 뭐가 그렇게 싫을까, 뭐가 그렇게 어려울까, 넌 왜 그럴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를 품에 안아 토닥토닥 달래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벌써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결국 내쪽에서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러곤 급히 김을 구워 하얀 밥을 넣고 싸 줬다. 아이는 얼른 받아먹었다. 수저에 시금치 소스가 묻어 있었는데도 별 거부감이 없었다. 어라? 혹시나 싶어 하얀 밥 안에 초록 밥을 넣고 김을 싸줬다. 이번에도 냉큼 받아먹었다. 다시 한번 더! 이번에는 초록 밥만 김에 넣어 봤다. 역시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맛있어?"

"네~!"


울상이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내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말투는 느긋하게 굴었지만, 손놀림은 타짜의 고니, 조승우 못지않게 움직였다. 연신 초록 밥을 김 속에 넣어 아이 입에 넣기 바빴다. 아이는 꿀떡꿀떡 잘 받아먹었다. 서서히 마음을 놓고 한 번 더 입속으로 골인...... 하려던 찰나! 아이가 대뜸 뒤로 얼굴을 뺐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미간에 인상을 잔뜩 쓴 아이는 '이거 아니야, 싫어' 하며 김 밖으로 빠져나온 초록 밥을 가리켰다. 재빨리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치즈를 떼 초록 밥 위에 붙였다. 초록밥이 안보이자 아이는 다시 '아~'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초록이었다.

초록을 잊었었나 보다.

초록이 싫었고

초록이 무서웠나 보다.

초록이, 초록이, 초록 밥이 잘못했다.




아이는 언제쯤 이 세상의 새로운 것들을 안전하게 느낄 수 있을까
 


단순한 밥 투정이라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고 오해였다. 초록밥이 필승 메뉴로 불렸던 것은 과거의 영광이었을 뿐, 지금은 그저 마녀가 줄 것 같은 독약과도 같은 낯선 불안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민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매일 새로운 세상을 소개해 주는 일과 같다. 매일 가던 놀이터에 새로운 놀이기구 하나만 들어와도 다른 곳에 가야 하고,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삼촌과도 매번 새롭게 인사하고 다시 친해져야 한다. 아이의 마음에 매일 익숙한 단 하나는 오직 엄마와 아빠 뿐이다. 이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아직 너무도 긴 여정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는 아이만의 세상을 위한 가이드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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