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대형 마트에 다녀왔다. 오픈 시간 즈음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남편이 카시트에서 아이를 내리는 동안, 나는 매장 입구에 놓인 카트를 하나 빼 손잡이 부분을 소독했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새로 생긴 습관이다. 곧이어 아이를 카트 앞자리에 태웠다. '이 자리에 탈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매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카트를 밀던 남편이 말했다.
"이거 좀 이상한데?"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뭔가 좀 삐걱거렸던 모양이다. 이상하면 새로운 걸로 바꾸자 했지만, 아이를 내리고, 카트를 넣고, 새로운 카트를 빼고, 소독을 하고, 다시 아이를 태우는 과정을 떠올린 남편은 괜찮다고, 그냥 가보겠다고 했다.
성격 급한 나는 카트보다 몇 걸음 떨어져 앞장서 걸었다. 1+1 칫솔과 1+1 섬유유연제를 양손 가득 들고 남편을 기다리는데, 저쪽 편에서 걸어오는 남편의 폼이 영 불편해 보였다. 그제야 카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른쪽 앞바퀴가 공중에 붕 떠 있었다. 세 개의 바퀴는 무게 중심을 포기하고 왼쪽 편으로 자꾸 기울었고, 카트를 앞으로 반듯이 밀기 위해 오직 남편만이 쓰지 않아도 되는 힘을 쓰며 애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카트 바꿀까?"
카트 안에 담긴 것은 여전히 앞자리에 탄 아이밖에 없었다. 그러나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남편은 또다시 거절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위로 올라가야 하는 과정이 추가됐으니, 그의 머릿속 장보기 미션의 순서도가 보다 더 번거로워진 것이다. 나는 손에 쥔 것들을 우르르 카트 안에 쏟아 넣은 채 다시 앞으로 걸었다.
1+1 파스타 소스 두 개와 1+1 해바라기유 두 개를 들고 몇 블록 앞에서 또다시 남편을 기다렸다. 정면에 아이 얼굴이 보였다. 마스크에 가려져 눈만 보여도 '신남'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얼굴. 얼굴? 보통은 아이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았나? 가만 보니 남편은 카트를 반대로 돌려 고장 난 바퀴 쪽에서 밀고 있었다.
카트에는 우리의 식량이 절반쯤 차 있던 상황이었다. 이제 나도 선뜻 카트를 바꾸자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요령이 있지 않을까? 하고 내가 한 번 밀어봤다가 행사 매대에 놓인 시리얼을 그대로 엎어버릴 뻔했다. 앞에서 밀든 뒤에서 밀든 중심이 기울어지는 것은 비슷했다.
결국 남편이 찾은 최선책은 카트를 옆으로, 가로로 두고 미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오면 비켜섰다가 다시 돌려세우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모르는 사람들은 장난기 많은 아빠 혹은 좀 이상한 사람으로 봤을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참 미련하고도 창의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우리의 점심으로 사라질 초밥 한 박스와 치킨 한 통,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더 해 물건들은 카트 위로 봉긋하게 담겼다. 비로소 우리의 장보기 미션이 끝난 것이다. 19만 9천 원의 비용만큼 남편의 팔 근육도 99% 풀파워로 열일을 했다. 차에 짐을 다 싣고 나서 고장 난 카트를 제자리에 돌려두고서야 우리는 말했다.
"아, 그냥 처음부터 카트 바꿀 걸 그랬어."
맞다. 이상함을,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던 그 순간 바꿔야 했다. 지나온 과정이 아쉽고 아깝더라도, 다시 처음부터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힘 빠지더라도 말이다.
매주 토요일 업로드되는 수박양 작가의 네이버 웹툰 [아홉수 우리들]에는 고시 공부를 하는 스물아홉 김우리가 나온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독서실, 시험, 압박감, 열등감, 불안감. 모두 그녀가 맞닥드리고 있는 일상 그 자체였다. 사실 공무원은 그녀가 좋아하는 일도,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다만 부모님의 압박에 못 이겨, 또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라서 습관처럼 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싫어하는 것들로 가득 찬 자신의 스물아홉을 되돌아본 우리는 학원을 그만둔다. 고장 난 카트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기로 결심한 것이다. 대형 마트 한층 거리보다 훨씬 더 오래 걸어온 길을 포기하고, 에스컬레이터 따위 존재하지 않는 척박하다 못해 메마른 땅을 다시 걸어서.
"그냥.. 겁이 나서. 지망했던 교대도 결국 못 갔고, 졸업하고 나서 취업도 제대로 못했고.. 무엇 하나 부모님이 만족할만한 건, 해내지 못했으니까. 공시는 마지막 기대였는데 이것마저 결국 포기했다는 걸 말하기가 두려워.. 공부 외에 뚜렷한 비전이 있었다면 좀 더 말씀드리기 쉬웠겠지만 아직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김우리 니- 착한 척 좀 고마해라. 부모님 실망 쫌 시키는 게 그리 무섭나? 니가 뭐 범죄를 저질렀나? 공부 쫌 하다가 아이고- 못하겠심다- 하고 그만두는 건데 그게 와? 뭐 그리 죽을죄를 지었다고 눈치 보고 사는데?! 제멋대로 기대해 놓고 실망한 것도 부모님이시고- 그건 부모님 마음이지 니 마음은 아니잖아. 니가 누굴 만족시키려고 태어난 건 아닌데- 착한 딸, 잘난 딸 재미없다. 착한 척 고만 집어치우고 '그냥 김우리' 하면 안 되겠나?"
친구 영광의 말을 듣고 '그냥 김우리'가 된 우리는 부모님께 고시 중단 사실을 고백하고 집에서 쫓겨난다. 그러고는 좋아하는 것들로 일상을 채우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길을 걷기 시작한다.
우리의 카트 안에 담겼던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됐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행정법이나 교육학 같은 것들을 쓰는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러나 카트를 비우기 아쉽다고, 아깝다고 계속 끌고 다니며 힘을 쓰는 것은 싫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애쓰는 것과 다름 없다. 오히려 텅 빈 카트가 나의 하루를 즐거운 것들로 채울 수 있는 희망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 스물 아홉 김우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제빵을 배운다. 꿈을 찾는 날은 조금 더 멀어졌을지 모르지만, 다시 제대로 시작한 그녀의 발걸음에는 단 꽃내가 풍겨 나왔다.
다시 내게 묻는다.
나는 내 인생의 카트를 잘 뺐는가?
어딘가 좀 이상하고 불편하다고 느끼진 않는가?
지나온 길이 아깝다고
이미 담긴 물건을 빼기 아쉽다고
잘못된 카트로 계속 길을 걷고 있지는 않은가.
멈추자.
되돌아가자.
새로운 카트를 가지고 와
필요한 것들만 옮겨 담자.
우리는 카트를 더 편하게 움직이며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울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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