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연식있는 구직자 스토리인데?
그러니까, 토이스토리가 아니라 구직자스토리다. 나이 먹고 버려진 장난감들의 주인 기다리기. 나 좀 써주세요 하는 나이 먹은 구직자 스토리 같다. 그러니까 토이스토리에 나오는 주인공 장난감들에게는 뚜렷한 삶의 목표가 하나 있다. 주인(아이/kids)으로부터 간택 받는 일이다. 연식 좀 있는 장난감들은 더 그렇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간택될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생긴다는 건 편안한 루틴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불확실 속의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거다. 때론 변덕스러운 주인 비위 맞출 일도 생기겠지만, 적어도 편한 삶을 산다.
토이스토리 주인공 우디의 두 번째 주인 보니. 우디가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건 이미 물건너간 일인 듯하다. 슬프지만 우디도 나이를 먹을대로 먹었다. 장난감도 연식이 있는 것. 주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때다. 주인의 최애 장난감이 되겠다는 쓸데없는 욕망 따윈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어 보인다. 주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니. 주인이 새로이 꽂힌 새로운 장난감 포키가 자신의 몫을 잘하도록 도와주는 게 이제 그의 몫이다. 조연 역할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때다.
토이스토리 속 장난감들은 주인 있는 삶을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다. 주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안식처가 있다는 이야기니까. 주인의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던 젊은 시절, 황금 같은 시기는 이미 지나고 없다.
연식 꽤 있는 구직자도 마찬가지다. 언제든 관두면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이지 하던 젊은 시절은 이미 다갔다. 넘치던 열정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들은 이미 산산 조각나 있다. 젊은 내 벌건 입술을 부러워하며 화장대 서랍에서 붉은색 립스틱을 꺼내는 엄마의 삶이 아련하게 가슴 속을 후빈다. 그녀의 삶이, 그녀가 느꼈을 의식의 흐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토이스토리 속 장난감들도 홀로서기의 두려움을 처절하게 깨달았을 거다. 그래서 주인 있는 삶을 애타게 원했을 거다.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주인을 만날 가능성도 적어진다는 사실, 그들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들이 주인이 있는 삶을 갖자고 바둥대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거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거다. 주인 집 밖은 정글이다. 주인의 사랑을 느낄 수 없을 지언정 포근한 침대가 있는 집안은 적어도 따뜻하다. 사회도 그렇다. 직장 안은 전쟁터지만, 바깥은 지옥이다. 주인(고용주)은 까다롭기 마련이다. 아니 까다롭게 굴어야 할 거다. 그들 만의 고뇌가 있을 거다. 삶이란 녹록치 않기에 그들 역시 찌들려 있고 녹초가 돼있을 거다. 정신이 성할 리 없다. 문드러진 내면은 그들의 소유물(?)에 쉽사리 전이된다.
주인이 있는 삶을 원한다면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 주인마저도 만나기 어려울 수 있으니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되면 된다. 그 역시 만만치가 않을 거다. 내가 되는 것(Being myself)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지하게 짓밟히고 소모 당하는 과정이 뒤따르니까.
결국 주인(사회)에게 짓밟힐 건지 홀로 설 건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현실적으로 주인 없는 삶이란 쉽지 않다.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 위에 힘들게 쌓아 올려야 하는 벽돌집을 짓는 것 같다. 힘들게 집짓기를 완수했다고 해도 그때부터 시작이다. 시작은 반이라지만 뭐든 유지가 더 어렵다. 그렇게 지어 올린 벽돌집도 자연재해에 탓에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유지 보수도 쉽지 않다. 물론 장점은 있겠다. 적어도 남의 눈치 안보고 내 한 몸 편하게 누일 수 있는 공간은 생기니까. 내 공간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Being myself가 되는 것이다.
토이스토리 속 우디가 보니의 품을 포기하고 ‘보핏’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난 것도 같은 맥락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