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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망 Oct 09. 2020

어둠에 익은 빛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온다. 방은 점점 잿빛으로 물들어가지만, 전등은 천장에 매달린 채 깜깜무소식이다. 나는 방 한쪽에 있는 조명에 손을 뻗는다. 그리고 방을 채우는 은은한 빛에 의지하여 든든히 할 일을 이어나간다. 어둠을 밝히는 데 거창한 빛줄기는 필요치 않다. 그저 그윽한 달빛 한 줄기가 창문으로 들어와 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거울 없는 내 방은 월광이 이리저리 뛰놀 곳이 못 되지만 말이다. 조금은 삭막해 보이는 방이다.     


화장실도 마찬가지다. 간단한 볼일이면 밖에서 스며드는 불빛으로 화장실을 사용한 지 꽤 오래됐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게 여기서 시작됐다. 우리 집 화장실에는 백색 조명이 널찍한 거울 위에 달려있다. 그렇게 순백의 광선이 내리쬐는데, 백치미 같은 웃음을 머금고는 내 얼굴을 거울에 낱낱이 반사한다. 나는 그 앞에 서서 당당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고개를 들어도 못 본 척 시치미를 뗀다. 눈앞에 찾아온 불청객을 피해, 어느덧 나는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거울을 바라보면 이목구비 주변으로 살색과 적색 반점의 사투가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승패는 불 보듯 뻔했다. 그것은 내 청춘을 울긋불긋 덧칠한 것도 모자라 깊은 발자취까지 더러 새겨놨다. 빌어먹을 놈들. 그럼에도 그것과 나를 떼어 생각하기는 어렵다. 때는 희미한 게 빠지기 더 힘들듯 그것은 여전히 내 삶에 흐리멍덩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때 느꼈던 생각과 감정이 지금도 나를 옮아 매고 있다.     


밝은 빛이 싫다. 따사로운 햇살도, 맑은 백색 조명도 전부. 빛은 어떤 것이든 낱낱이 그리고 명명백백히 파헤치는 성질을 지녔다. 다시 말해서, 남의 결점을 들추는 데 스스럼이 없고 조그마한 티끌도 용납하지 않는다. 반면에 어둠은 모든 걸 포용한다. 어떤 이색(異色)이든 어떤 흠집이든 포근히 그 위를 감싸 안는다. 그것은 잿빛을 띤 비단 이불이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쭉 펴 덮으면, 나는 당당히 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했던가. 집 밖의 온갖 밝은 빛들, 특히 사람들 눈에 달린 쌍라이트는 날 어둠 밖으로 끌어내린다. 빛을 드리워 검은 비단을 걷어내고 내 발꿈치 뒤로 내동댕이치는데, 내 얼굴이 달 표면처럼 애처롭게 빛을 받는다. 아니 그건 어쩌면 울퉁불퉁 패어 못생긴 내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황황히 다가오는 빛에 대항한다. 빛을 빛으로써 맞서는 것이다. 눈이 부셔 누구도 내 치부를 엿보지 못하도록 얼굴에 밝은 미소를 내건다. 날카로운 광명이 내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지 못하게 양 입꼬리를 치켜들고 허한 면상을 끊임없이 발광케 한다.


그렇게 목 위로 태양을 치켜들면 마음은 필연적으로 저물어간다. 푸르름을 띠며 세차게 흐르던 강물은 지하수처럼 고여 탁해지고, 밤하늘의 별들은 듬성듬성 난 수염처럼 빛을 잃는다. 오직 달빛뿐이다. 나는 그것을 습관처럼 찾아 등을 지고 앉는다. 은빛 줄기가 냉랭하게 떨어지고 있다. 나는 그 아래에서 몸을 힘껏 웅크린다. 따스한 입김이 날아올라 은빛 냉기와 섞이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윽고 온몸이 파르르 떨린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가만히,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되돌아온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켜 방 안을 환히 밝힌다. 아니다. 전등을 끄고 조그마한 조명에 손을 옮긴다. 안도의 한숨이 어슴푸레한 빛줄기 사이로 지나가면서 그 아래로 희미한 그림자가 축 늘어진다. 마음은 그제야 움을 틔우듯 꿈틀거린다. 지평선 너머로 검붉은 원이 빼꼼히 주위를 물들이는 게 보인다. 은빛 줄기는 곧 금빛으로 가득 차 암흑을 몰아낼 것이다. 어둠에 묻힌 나를 밝히는데 거창한 빛줄기는 필요 없다. 나는 그저 그윽한 달빛 한줄기가 창문으로 들어와 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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