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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망 Aug 31. 2020

미치지 않고서는

不狂不生(불광불생)

    오랜만에 기억을 손으로 꼼꼼히 되짚어가며 추억을 잠기는데 점차 익숙한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로 모아 겹쳐봤더니 놀랍게도 한 장면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나는 쳇바퀴 위를 달리고 있다. 갑자기 등을 떠밀리기도 하고 손에 무언가가 닿을 듯하여 팔을 허공에 쭈욱 뻗친다. 그러면서 거칠게 내뱉는 입김이 몸에 닿을 때면 송골송골 맺힌 땀이 느껴져 잠시나마 나를 위로한다. 그때의 내가 불행했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다만, 이런 나에게서 조금은 낯설어지고 싶을 뿐이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나는 주변의 환심을 사려고 꽤나 애썼던 것 같다. 그들의 관심만이 오롯이 나를 채웠고, 동시에 밑 빠진 독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타원을 비뚤게 그리며 나를 비웃는 것 같았지만 결코 지치는 법이 없었다. 가끔 그때의 버릇이 자연스레 튀어나오면 옆구리를 찔린 듯 아프면서도 한쪽 입꼬리가 쭈욱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가 없다. 그저 평범하지 않다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난 그 순간 태양을 앞에 둔 불나방이었다.     

    

    감정 기복이 무엇보다 싫었다. 감정은 날 위한답시고 항상 특등석을 마련해두었고 그것이 롤러코스터가 될 줄 알면서도 올라타는 내가 싫었다. 배운 대로라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건 굉장히 미숙한 행동이다. 그래서 난 이 통제 불능의 개구쟁이가 지나다니는 곡선 중간 즈음 어딘가에 못을 박고 그곳을 부동점이라 선언해버렸다. 조금은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가끔 일말의 불안감이나 무기력함이 밀려와 휩쓸릴 때도 있었지만 지나가는 성장통이라며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문득 거울을 돌아보니, 그곳엔 부동점에서 감겨 내려오는 낡은 실에 팔다리가 묶인 고요한 꼭두각시 인형이 있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되뇌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특별하다'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주위 사람들에게 O와 X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내 특별함을 알아봐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 지었던 것이다. 마침내 인생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X가 보이는 이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자 더는 마주치기 껄끄러워진 것이다. 뭐 괜찮다. 아직 날 좋아해 주는 이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결국 O가 보이는 이들 앞에서도 서기가 두려워졌다. 왠지 모를 부담감 때문이었다.          


    이런 나 자신과 처음 마주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순간 한숨이 푸욱 나오며 '헛살았구나' 싶었다. 필사적으로 공들여 쌓은 탑은 모양만 커다란 감옥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허망한 눈으로, 그때서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도 나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다들 무언가에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주위의 인정에 안달복달하고, 돈에, 종교에, 이념에, 사랑, 꿈, 인간관계 등등 다 셀 겨를도 없다.       


    솔직한 소감은 이거다. 큰 혹을 하나 떼놓은 것처럼 안심됐다. 다들 어쩔 수 없이 무언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다움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일의 난 무엇에 미쳐있을까 상상해본다. 지금처럼 글쓰기에, 아니면 찬란해 보이는 과거의 영광에 붙들려 현실에서 눈을 감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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