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2
작년에 제주에 와서, 생각지도 못한 비 때문에 이도 저도 못하고 숙소에만 있을 때 그나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준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책방무사에서 산 최은영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다.
아침에 비가 멎었길래 잽싸게 오름이라도 한 군데 다녀와야겠다고 버스에 올랐는데, 네이버 지도에 표시된 것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버스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러다 제주시까지 넘어가 버릴 듯한 기세이기에 중간에 아무 오름이나 보이는 곳에서 일단 내렸다. 날씨 때문인지, 시간 때문인지, 그냥 인기가 없는 곳이었는지, 사람은 나 혼자 뿐. 일단 왔으니 표지판에 안내된 길을 따라 성큼성큼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높지는 않았는데, 정상께에 올라 분화구를 한 바퀴 돌아보는 길이 꽤 험난하다. 아무리 억새가 좋은 가을철이었다 하더라도, 이건 좀 심했다. 사람이 한 번도 안 지난 듯 우거진 억새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걸어왔던 길은 하나밖에 없었고, 여기가 길이 맞긴 하다는 듯 드문 드문 인적 비슷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숲을 헤치며, 이대로 조난을 당하면 어떡하지 고민하며, 조금씩 빗방울까지 내리기 시작하는 찰나 저 멀리 억새밭 끝으로 빠져나가는 길의 꼬리가 보였다. 그 길만 바라보며 억새를 헤치고 나아가 언덕을 넘었다. 눈 앞에 펼쳐진 익숙한 풍경.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나는 정상 주위를 한 바퀴 다 돌았던 것이다. 언덕 너머에는 내가 정상까지 올라왔던 그 길이 다시 펼쳐져 있었다.
오름에서 내려와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기에 택시를 불렀다. 마침 들어가는 길에 수산리를 지나가기에 요조의 책방 무사에 들러 그 책,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샀다. 책은 나에게 희미한 정도가 아닌, 아주 충분한 빛이 되어주었다. 늘 연약한 마음을 토닥이는 최은영 작가의 작품이 좋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때 나에겐 그저 뭔가 ‘할 일’ 자체가 필요했었다. 마치 길을 잃어버린 억새밭 사이에서 마침내 발견해 나를 계속 나아가게 만든 길의 흔적 같았다고나 할까. 비바람이 불어오고 차도 없던 흐린 제주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줄기 햇빛을 만나는 심정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뭐 실은 혼자 하는 여행에 책만큼 좋은 동무도 없는 것 같다. 이번 여행에는 아예 책을 두 권 들고 왔다. 가져온 책을 다 읽는 것, 그리고 이곳 제주에서 책을 또 한 권 사는 것을 이번 여행의 한 가지 미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중 한 권인 김연수 작가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어제 다 읽었다. 이미 반 정도 읽은 소설집이긴 했다.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는 한 책방의 낭독회를 계기로 계속 소설을 써 내려간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 책에 담긴 소설은, 작가가 낭독회에서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쓴 작품들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낭독회를 통해 진짜 사람의 얼굴을 봤다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마침 이번 제주행에선 나도, 낭독회는 아니지만 한 책방의 북토크 참여를 신청해 둔 터였다. <이제 진짜 제주로 갑서>라는 책에 대한, 제주 사람들이 모여 진짜 제주의 마을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라고 했다. 이제 제주살이 10년 정도 되었다는 책의 저자와, 저자가 책을 쓸 수 있도록 제주의 이야기를 들려준, 평생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하는 삼춘들 셋이 앞에 준비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북토크에 참석한 사람들도 제주의 토박이가 반 정도, 저자처럼 다른 곳에서 제주로 넘어와 살고 있다는 사람이 반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자기가 제주에서 살게 된 과정과 이 책을 내기까지의 여정을 간단히 설명한 저자는, 진짜 이야기는 여기 삼춘들의 제주 이야기에 있다며 빠르게 마이크를 넘겼다. 평대리의 빨간 등대와 그 앞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에스파냐 상선의 이야기, 조선시대에 쌓은 진성이 그대로 담장이 된 수산초등학교와 곧 그 학교가 제2공항 건설로 인해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는 이야기, 제주에서도 시골인 우도에서는 전기가 그렇게도 늦게 들어와 밤이면 반짝이는 본섬을 바라보며 탈출을 꿈꿨다는 이야기.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제주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마을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실은 내가 더 좋았던 건 삼춘들의 말속에 드러나는 어떤 삶의 자세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책 제목을 바꾸자고 했어. ‘갑서‘는 혼자 간다는 거잖아, ’갑소‘나 ’갑당게’(사투리라 정확한 단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ㅜ)로 하면 얼마나 좋아. 같이 가야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적어. 함께 해야 돼“라는 말. 수산리의 중심이기도 한 수산초등학교를 지키기 위한 활동에 대해 ”마을이 우리를 키웠으니까“ 당연히 마을을 위해 무언가 하나라도 더 하고 싶었다는 말. 마지막에 약간 울컥하면서도 ”(우리 또한 부모님께 받은 것이기에) 제주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이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할”이라던 말. 천천히, 꿋꿋이, 의심 없이 사랑하며 삶의 터전을 다져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들이 나를 돌아보게 했다. 늘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꾸며 한 발은 반쯤 공중에 띄워놓고 살았던 지금까지의 나를.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중요한 건 체험이 되느냐, 경험이 되느냐예요. 체험은 일시적인 인식에 그치지만, 경험은 나를 바꾸죠. 일회성을 넘어 나의 사고에 영향을 주게 될 때 비로소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왜 이 말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오늘에서야 진짜 경험을 하고 있구나 싶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수산초등학교에 들러 수산진성을 살짝 둘러보았다. 내일은 평대리에 들러 빨간 등대를 보고 샆다는생각도 들었다. 더 많은 제주의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고, 그러면서도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질문이 깊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