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에 햇빛이 쏟아지는 날

[개짱이 다이어리] 2025.11.09의 글

by 배짱없는 베짱이

공복에 운동을 하겠다고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왔다. 자전거를 타고 불광천을 따라 한강으로 나와 망원나들목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분 남짓, 두꺼운 잠바를 입고 나와선지 등에 살짝 땀이 배긴다. 늘어선 단풍과 높고 파란 하늘과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과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 사이에 나 또한 섞여 있다는 사실이 묘한 안도감을 준다. 기꺼이 만끽하고 싶은 세상이다.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던 지난주는, 금요일 퇴근 전에 받은 한 통의 메일로 인해 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열심히 쓴 원고는, 글이 이상하다, 읽히지도 않고 엉망이다,라는 피드백을 받았고, 이미 디자인이 들어간 원고까지 들쑤셔 사실상 모든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와버리고 말았다. 사무실에는 나 혼자라서 어느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고, 사실상 내가 혼자 끌고 오던 프로젝트이니 아마 누군가 있더라도 뾰족한 조언을 내줄 순 없었을 테고, 곧바로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지만 제대로 먹힐 리가 없었다. 아 역시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다. 또 남아서, 또는 주말에 나와서 수습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면 정말 일하는 기계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는 마음에 그냥 뛰쳐나왔다.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무겁지만, 일부러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않고 있다.

평일 내내 조금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 잘해보겠다고 하루 종일 매달려서 정리한 원고에 대해 쏟아지는 무참한 피드백들이 그랬고, 그럼에도 일정 내에 끝내보겠다고 저녁도 안 먹고 8~9시까지 일하다 집에 오면 마땅히 먹을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어 냉동실에 얼려 놓은 먹다 남은 피자를 한 조각씩 데워 먹었다. 잠깐이라도 일 생각을 잊겠다고 또 TV를 틀어 이리저리 예능을 돌려보다 잠들면 어느새 다시 출근할 시간이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자고 다시 회사에 들어갔던가? 이것도 어떤 과정이 되려나? 나는 지금 어디론가 향해가고 있는 중인가?

얼마 전 만난 지인은 나에게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때 그렇게 남미를 다녀온 사람이란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라고 했다. 그만큼 모험도, 도전도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 보인다는 말이렸겠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새로운 일도 새로운 모험이에요.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도전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죠. 라고 대답했는데 요 며칠은 잘 모르겠다. 그나마 이전에 하던 일과 가장 흡사하기에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분야에서 이렇게 헤매고 있다니. 단지 클라이언트가 진상이라는 말 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주말 동안 누워서 만화 <히스토리에> 전권을 재독 했다. <기생수> 작가의 두 번째 장편이기도 한 <히스토리에>는 기원전 4세기, 서양에 헬레니즘 문화가 시작되는 계기를 만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 때에 서기관을 지낸 에우메네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다. 에우메네스는 문관이지만, 뛰어난 지략과 상황 판단력으로 전투현장에도 종종 불려 나간다. 만화이기에 현실보다 더 부풀려지거나 극적으로 다뤄진 부분들이 있겠지만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로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보는 에우메네스의 모습이 지금 나에게 부족한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 결과가 틀리더라도 스스로 당당하고 자신 있게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그만큼 나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중심에 놓고 무엇보다 내가 나를 아끼며 살아야 할텐데, 라는 뻔한 깨달음을 새삼 얻는다.

참고로 2003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히스토리에>는 이제 겨우 12권이 나와 있다. 최근에 나온 12권이 2024년에 나왔고, 11권은 2019년에 나왔다. 이와아키 히토시 작가의 건강 문제 때문이라는데, 이제 독자들은 결국 <히스토리에>를 완결까지 못 보게 될 것도 우려하고 있다.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이렇게 많은 전 세계인을 안달 나게 하다니. 에우메네스는 그 시대의 유명한 전략가였다. 역사가 이미 스포일러인 셈인데 스포일러를 당했음에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고 끝까지 보고 싶게 만드는 작가란 작자들의 힘이 대단할 뿐이다. 사실을 기반으로 할지언정 그가 풀어내는 건 사실상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물이다. 펜 하나로 그토록 정교하고 알고 싶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당당하고 자신 있지 못하다면 쉽지 않은 일이겠지.

‘핵개인의 시대’라고 한다.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서 일하고,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들을 모아 뭉친다.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보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이다. 점점 가속화될 새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무기는 무엇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앞에 나서서 선봉에 서는 역할보다는 조력자가 되는 게 좋았고, 지금도 깔려진 판을 잘 정돈하는 일을 잘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사실 그건 핵개인의 시대에 크게 필요한 능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나를 찾고 싶게 만드는 나만의 능력은 무엇일까? 기록하는 것? 글 쓰는 것? 하지만 기록은 게으름에 밀려 자꾸 뒷전이 되고 글 쓰는 건 이렇게 힘들다. 글 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짜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씩 하게 되는데, 스포일러를 알면서도 쫓아가게 만드는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 궁금해지고 들여다보고픈 이야기를 언젠가 풀어내볼 수 있을지.

햇빛이 좋아서 집에 오자마자 빨래를 돌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베란다에 널었다. 바람이 차지만 햇빛이 쨍하니 밖에서 말려도 좋을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쏟아지는 햇빛 아래 빨래를 널고 있으니 볼리비아 생각이 난다. 그 유명한 소금사막 투어를 하며 우유니에 머물 때였다. 해발 4천 미터쯤 되는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도시 우유니는 공기가 매우 차고 춥지만 햇빛이 따갑게 쏟아지는 건조한 동네였다. 아침저녁으로 패딩을 두 겹씩 입어도 턱이 덜덜 떨리는 추위가 기본이었지만, 태양이 높게 떠오른 한낮만큼은 스웨터 한 벌로도 버틸만했다. 매일 아침 전날 입은 옷을 빨아 쨍쨍하게 쏟아지는 햇빛 아래 널고 나면 점심 무렵 바짝 마른빨래를 수거할 수 있었다.

숙소는 그 동네에서 비싼 편이었지만 그만큼 괜찮다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방 안에는 늘 냉기가 돌았고 벽지도 안 바른 벽에 침대 하나 덩그러니 놓인 네모 반듯한 방이 지금 생각하면 약간 감옥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다. 경량패딩과 수면양말을 신고 두툼한 이불속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며 페루에 있는 친구에게 빨리 내려와 나와 함께 여행을 계속하자고 꼬셨다. 밤새 우유니에서 본 별과 별 사진을 찍는 이야기를 하며 다시 따뜻한 지역으로 떠날 계획을 짰다. 생각해 보니 그때만큼 내 모든 것이 이야기였던 시절이 또 없다. 이제 우유니에는 웬만한 숙소에 방마다 온풍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모두 그때의 나보단 따뜻한 느낌으로 우유니를 기억하겠지. 그때의 나와는 또 다른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겠지. 그때의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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