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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방울 Oct 17. 2022

여학생휴게실에서의 별 헤는 밤

#14. 빛나는 새벽의 기쁨이여

먹고 자는 인간의 습성상 하루에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로스쿨에서 요구하는 학습량의 방대함은 종종 그 한정성을 초월한다. 더욱이 그중 상당 시간을 아기들을 돌보고 재우며, 외국인 남편을 대신해 식료품 및 생활용품을 구입하는 등 살림살이를 하는 데에도 할애한 나의 경우 시간 부족은 변호사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조급해져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 한들, 공부는 순조롭게 잘 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지독하게 안 되는 날이 있다. 실제 공부해보면 단연코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대부분의 로스쿨 학생들이 법학 공부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 매일 같이 열람실을 지키지만, 앉아서 공부하는 내내 진지하게 기본서를 정독하면서 머릿속까지 열공 모드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열람실에 하루 열두 시간을 앉아 있어도, 진짜 공부한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저마다 '순공 시간'을 타이머로 측정해 정해진 시트에 기록하는 방법이 당시 유행이었다. 나도 시도해봤지만 화장실에 갈 때마다 번번이 타이머를 껐다가 다시 켜는 것을 깜박하는 바람에 깔끔하게 포기하고 말았다. 




처음 여학생휴게실에서 쪽잠을 청한 날은, 중간고사인지 기말고사인지 여하튼 시험기간의 한가운데였다.


로스쿨에는 샤워실도 있고 침대방, 온돌방 등 비교적 다양한 형태의 휴게실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생활 밀착형으로 얼마든지 학교에 머물 수 있는 특이성이 있다. 알면서도 이전까지 그러한 시설들을 이용하지 않은 이유는 공동생활에 대한 일종의 결벽증 내지 찝찝함이랄까. 자취집이 걸어서 5분 거리로 가까워서 굳이 학교에서 샤워를 하고 잠을 잘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쌍둥이 임신 및 출산을 거치면서 부득이 마련한 새 보금자리는 걸어서 최소 15분이 걸리는 데다, 일단 집에 들어가면 아기들을 돌봐야 하는 일손(?)이 부족해서 그러저러한 핑계로 좀처럼 다시 학교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점심은 당연한 듯 혼밥을 했지만 저녁은 가족들과 따뜻한 집밥을 먹고 싶은 마음에 6시 즈음에는 슬금슬금 열람실을 나섰다. 저녁만 먹고 학교로 돌아오자는 다짐은 매번 해봤지만 부질없었다. 로스쿨생으로서는 터무니없이 이른 퇴근을 그렇게 반복하고 있었다.


로스쿨 전체 과정이 변호사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일련의 시험기간인 셈이지만, 교내에서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과 그 이외의 기간 차이는 커서 시험기간이 아니고서야 여학생휴게실에서 낮잠이 아닌 밤에 잠을 자는 경우는 전무하다. 기숙사나 자취집을 놔두고 불편하게 외부에서 자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매일 같이 6시에는 집으로 향하면서 공부시간이 부족하다고 걱정하던 나는, 어느 날 이 점에 착안해 혁신에 가까운 아이디어를 냈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새벽까지 마음껏 공부하다가 여학생휴게실에서 자보면 어떨까!?' 


복학하고 나서 시험기간에만 간간이 이용하던 여학생휴게실을 로3이 되고부터는 좀 더 정기적으로 활용해보기로 한 것이다. 베개 등 간단한 침구류는 휴게실에 이미 갖춰져 있지만, 쇼핑몰에서 부지런히 검색해 부드러워 보이는 두툼한 침낭도 마련했다. 자정이 가까워 하나둘씩 사라지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일명 '모든 것이 이해되는 밤'이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침형 인간의 반대 성향으로, 늦은 밤에서 새벽 사이 눈빛이 말똥말똥해지며 정신이 맑아진다. 그런 이유로 아침보다는 밤에 공부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로스쿨생 중에는 아예 쉬다가 늦은 오후부터 밤샘 공부를 일상적으로 하는 여학생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서 생활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 8시 기상 스터디는 꼬박꼬박 출석했다. 밤에 공부가 잘된다는 이유로 아침잠에 면죄부를 줄 때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일상이 흐트러졌을지는, 의지가 박약한 인간임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겪어보지 않아도 눈에 보일 듯 알 수 있었다. 무조건 집을 나서야 한다. 


공부할 게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시험기간, 불현듯 산란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 선물 같이 찾아온다. 대게 저녁 먹고 밤 9시~10시 정도. 고도로 몰입할 때의 힘은 놀라운 수준이어서, 평소 좀처럼 소화하지 못해 끙끙댔던 법리가 그 순간 이해된다. 채권자취소권에 축적된 수많은 판례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나 계산 문제가 깔려 있는 복잡한 상계와 변제충당, 변제자대위 등등 주로 민법의 복잡하고도 오묘한 부분들을 다시 짚어보면 그제야 '아 이런 뜻이구나' 그림이 그려진다. 


그럴 때면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자가 된 듯 의기양양해져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책장을 넘기면서 키워드를 끼적이곤 했다. 새벽 두시 반에서 세시가 넘어가면 점차 체력이 소진되면서 '이제 그만하라'는 내면의 신호가 오는데, 몰입의 시간이 끝나는 게 아쉬워서 조금 더 보다가 보통은 늦어도 네시가 되기 전 열람실을 나선다.   


온돌방 형태의 여학생휴게실은 바닥이 뜨끈한 대신 딱딱하고, 침대방 형태의 그것은 난방이 되지 않아 쌀쌀해지면 한기가 돌았다. 그리고 두 곳 다 아주 인접한 시험기간이 아닌 이상 아무도 없었다. 잠들기 전엔 반드시 휴게실에 구비돼 있는 요가매트를 펴고, 굽은 척추와 틀어진 골반을 조금이라도 교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뒷구르기 10회와 스트레칭, PT 할 때 배운 플랭크 자세 1분을 버텼다. 로3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매일 아침 푸시업 50회를 했다는 친구의 노하우를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커튼이 쳐있지 않은 휴게실에 홀로 누워 창문 너머로 깜깜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내 잠들었다. 이따금 별 서너 개가 반짝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도 했다. 복학한 뒤로는 공부 걱정에 대한 초조함보다는 하루하루 내가 가진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다. 변시가 가까워올수록 불안해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는 동기들이 꽤 있었는데, 다행히도 여학생휴게실에서 자든 집에서 자든 변시 끝까지 불면증에 시달려본 적은 없다. 


꽉 찬 나이에 로스쿨에 들어가 몇 번이나 자퇴의 고비를 넘기며 갖은 고생을 했다. 덕분에 막연히 진학을 고민하는 누군가가 물어보면 '비추'하는 회의론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의 삶에서는 겪지 못한 로스쿨에서의 아름다운 기억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그 새벽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모든 것이 이해되던 그 밤- 휴게실 창가 너머로 총총히 빛나던 별들이 주던 안도감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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