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를 쓸 때 취미나 특기를 묻는 질문이 꼭 있었다. 그 질문에 특별히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가시간에는 주로 리모컨을 손에 들고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보냈고, 이것저것 호기심에 시도해본 것은 많지만 끝까지 해본 적이 없어서 특기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휴가랄 것도 없이 주말까지도 일하시는 부지런한 아빠였고, 가끔 시간이 나면 동네 서점에 데리러 가는 일이 전부인 평범한 엄마였다. 나를 위한 취미나 특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이력서에 칸을 채우기 위해 급하게 취미와 특기를 만들어야 했다. 가짜 취미. 가짜 특기를.
운동이든 악기든 무엇이든 한 가지 취미를 가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있었다. 그 덕분에 요가나 필라테스, 수영을 배웠고 우쿨렐레도 조금 쳤다. 성인 피아노 학원도 다녀봤고 영어회화학원도 끊었었다. 하지만 무엇도 오래가지 못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 이야기다. 적성에 맞는 취미를 찾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야근에 주말근무에 회식에 출장에 밀려 취미생활을 이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전업주부가 되고 '발레'를 만났다. 뻣뻣한 몸치였던 내가 발레를 만나고는 취미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삶의 활력을 채워주는 일인지 새삼 느꼈다. 취미는 부담이 없다. 그래서 좋다.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다. 그저 즐기면 그만이다. 열심히 하다가도 힘들면 잠시 쉬어가면 된다. 그러다 다시 하고 싶어지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 인생에서 하나쯤 부담 없이 눈치 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내 아이에게도 엄마의 취미생활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엄마라는 사람도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아들도 앞으로 팍팍한 일상에서 자신을 위로해 줄 취미 하나쯤 만들기를 바랐고 그 본보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발레를 소개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여섯 살이 된 아들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고 있었고 이미 발레는 여자아이들이 하는 거라며 선을 그었다. 그럴수록 아이의 선입견을 없애주고 싶었다. 근육질의 남자 무용수가 춤을 추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어린이를 위한 발레 공연을 찾았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멋진 춤을 추는 발레리나, 발레리노를 보여주는 것보다 더 좋은 소개가 있을까? 서둘러 티켓을 예매했다.
공연 당일은 공교롭게도 비가 많이 내렸다. 공연장은 세종문화회관. 집에서 공연장까지 가려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 꽤 먼 거리였지만 용감하게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버스에서 내려 광화문 광장에 늠름하게 서 있는 이순신과 세종대왕의 동상을 보자 아들도 ‘우와’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들은 걱정과 달리 너무나 의젓했다. 길을 헤매는 나에게 “엄마, 저기 타는 곳이라고 쓰여있어.” 라며 길도 알려주었고 70분 동안 대사 없이 춤만 추는 공연인데도 끝까지 집중했다. 공연 도중에 내가 말을 걸자 도리어 “엄마, 공연 볼 때는 조용히 해야지.” 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공연 중간에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후반부에 먼저 나와야 했다. 커튼콜까지 객석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서 복도에 있는 작은 모니터로 마지막을 지켜봐야 했다. 아이는 그마저도 너무 좋아했다. 오히려 밖에 나와서 보니까 마음대로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좋다며 감탄사를 연발하며 공연에 집중했다. 커튼콜 때 다시 자리에 돌아가 앉자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기특한 녀석.
공연이 끝나고 내가 물었다.
“어땠어?”
“너무 멋있었어. 키 큰 아저씨가 누나를 높이 들었잖아! 빙글빙글 돌고. 최고였어.”
“엄마도 발레 배우고 있거든. 그런데 너무 어려워. 엄마도 연습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엄마. 포기하지 않으면 할 수 있어.”
공연이 끝나도 비는 계속 내리고 신발과 양말까지 모두 비에 젖어 축축했지만 마음만은 감성으로 촉촉해지는 날이었다.
내가 발레를 배우지 않았다면 남중, 남고, 공대를 나와 남자만 가득한 회사에 취직한 남편이 발레라는 것에 관심이나 두었을까? 여자아이들이나 배우는 거라고 말하던 아들이 내 손을 잡고 발레 공연을 보러 갔을까? 생각할수록 발레는 배우기를 참 잘했다.
매년 연말, 예술의 전당에서는 호두까기 인형 전막 발레 공연을 한다. 12월이 되면 매주 발레를 배우는 어린아이들이 멋지게 차려입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공연장을 찾는다. 로비에는 호두까기 인형 기념품들이 즐비하고 예쁜 트리까지 더해져 연말 분위기를 한껏 풍긴다. 딱 한번 일 때문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봤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에게 로망이 되었다. 어느 해인가 연말, 남편과 아들 그리고 내가 멋지게 차려입고 호두까기 인형 전막 발레 공연을 함께 보는 일이다. 기왕이면 남편이 공연을 보다 졸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들이 지루하다며 집에 가자고 조르지 않으면 좋겠다. 그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발레를 배울 수밖에. 두 남자에게 열심히 홍보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