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을 버리니 찾아온 '편안함'

한국과 한 템포 떨어져 지낸 나날들

by 기록가 슈


한국 같기도, 미국 같기도


미국 한인 인구의 약 30%가 거주하는 캘리포니아.

이곳에 살며 가장 먼저 체감한 건 "한국만큼 편리하다"는 점이었다.

한국말만 써도 불편함 없고, 손만 뻗으면 익숙한 음식들이 널려 있다.
분명 미국인데, 어쩐지 익숙한 한국 같은 느낌.

그래서 때론 더 편하고, 때론 더 낯설다.


사실은 나도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편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영어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없다 할지라도.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편하다고

자연스레 한인사회에 들어가다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과 '눈치'가 느껴진다

특히 '情(정)'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다

오픈해야 하는 압박감 보다

조금 딱딱해 보여도 적절한 거리감과 선을 지켜주는

미국 문화가 나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복사판'


아이의 성장을 위해 한국보다 더 여유롭고 다양성이 있는 환경을 기대하며 미국에 왔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이곳의 한인 커뮤니티도 ‘입시’ 중심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운동과 악기를 입시 때문에 시켜야 한다는 대화가 들린다. 듣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오가는 이야기들.

비교와 경쟁, 그리고 ‘공유’라는 이름 아래의

무언의 압박.
어떤 학원을 다니는지, 시험 성적은 어떤지, 잘하는 게 있다면 함께 하자는 이야기들.
사실 나에겐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기본적으로 ‘부딪혀보자’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다른 아이들이 뭘하는지 안 궁금하다.

진짜 아이와 친한 친구라면 동선을 함께하기 위해 궁금할 수 있지만 말이다.


정보가 필요하면 온라인이나 ChatGPT에게 묻고,

필요한 솔루션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얽히거나, 일명 정보 모임 속

인싸가 되고 싶다는 욕구도 크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맞으면 만나고, 아니면 말고..


하지만, 가끔은 의도하지 않아도

‘주재원 가족’이라는 프레임으로 비칠 때가 있다.
득이 될 정보만 얻고 빠진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MI 업무를 해봐서 리서치에 일가견이 있는지라,

정보 필요 없는데.. 오히려 말 안 해도 다가와서 알려주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래놓고 욕하나봄. 도서관 열심히 다니고 수학은 좀 시키는 편인데 뭘 어떻게 알려줘야 똔똔인 정보공유가 되었다 느끼시는걸까...)

나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람들과 같은 잣대로 평가받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점점 조용히,

내 생활의 중심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선을 두고 살아보니 삶이 놀랄 만큼 편해졌다.

그냥 모든 게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이 거의 없는 학교로 옮긴 후 아이도 나도 훨씬 편안해졌다.

아이가 외국 아이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나도 어학연수 왔을 땐 한국인 피해 다녔지. 근데 결국 살아보니 한국 사람이 최고더라”
같은 말을 들을 필요도 없어졌고,

외국 엄마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한다고 해서,
"내 지인 국제회계사 자격증 있는데 영어 원어민인데”

(내 영어는 원어민까진 아니란 소리겠지. 근데 내가 왜 평가받아야 하지? 영어가 아닌 인맥 자랑이었던 건가)
같은 반응을 마주할 일도 줄었다.


어쩌다 외국 가족들 모임에 초대받은지라
이미 선약이 있어 한국 친구들과 함께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 상황을 굳이 설명하거나 눈치 볼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선택을 존중받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왜인지 모르게 외국 친구들과 논다 하면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모방은 최고의 찬사라고 하지만(?)


한때는 블로그에 정보성 글을 꾸준히 올리며

광고 수익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글과 닮은 컨텐츠들이 우연처럼 쏟아졌고
내 아이의 ‘야구 사랑’으로 시작된 이야기마저

다른 방향으로 재가공되는 걸 보며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누구를 탓할 순 없지만, 정성껏 쓴 글의 톤앤매너, 주제와 형식 및 컨텐츠 내 활동과 행동이 쉽게 복제되는 걸 반복해서 겪다 보니
‘아, 그냥 조용히 살아야겠다’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래서 네이버 블로그는 닫았고,

마음먹었던 브런치북도 한동안 쉬었다.


근데 최근 들어 문득 마음에 와닿은 문장이 있다.

“상대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모방이다.”
그 말을 곱씹으며, 한 톤 낮춘 시선으로

다시 글을 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한국과 한 발짝 멀어져,
아이와 함께 영어권 커뮤니티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다.


아이도 나도 조금 더 편안해졌고,
무언가를 일부러 증명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삶 속에서
내면의 평온을 더 자주 느끼게 되었다.




무분별한 모방이 주는 상처들


야구는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취미다.
아이가 스스로 흥미를 느끼고 시작했고,
힘든 시간을 야구를 통해 조금씩 이겨내면서
자신감을 찾고 즐거움까지 느끼게 된,

말 그대로 우리만의 소중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순수했던 시작이 주변의 관심과 반응 속에서 조금씩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야구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낸 뒤로
"그럼 외국 친구들 많이 사귈 수 있어?"라며
비슷한 시기에 야구를 시작하는 가족들이 늘었고,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디비전이 어딘지,

개인 레슨을 받는지,
장비는 뭘 쓰는지,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지 같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하나둘씩 질문이 쌓일수록 야구가 어느새 비교와 경쟁의 도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좋아서 시작한 건데,
이걸 굳이 드러내지 말아야겠다.
조용히, 우리만의 속도로 즐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어디까지 갔는지가 아니라
아이가 얼마나 즐겁게, 자발적으로

계속하고 있는가였으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기록하는 방식도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처음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나누는 즐거움이 컸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활동, 비슷한 형식의 글들이
반복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우연이라기엔 겹치는 흐름들 속에서
내가 공유했던 순간들이 가볍게 소비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새 누군가에게는 비교나 기준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속에서
내 마음도 조금씩 복잡해졌고,
그래서 글도, 일상도,
조금은 더 조용히,
우리 가족만의 속도로 지켜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결국 삶은 흘러간다, 내가 집중해야 할 방향으로


요즘은 타임지를 읽으며 단어를 정리하고,
미드를 보며 영어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다.
놀 듯이, 즐기듯이, 가볍지만 의미 있는 나만의 루틴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어울리는 친구의 가족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으며
누구와 비교하거나 눈치를 볼 일도, 억지로 맞춰야 할 일도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애쓰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나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 커뮤니티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내 모습, 우리 가족 모습을 발견했다.


미국은 봉사와 커뮤니티 중심의 사회이다.

나에게 득되는 것만 쫓지 않고 내가 시간이 되고

여유가 있다면 나서서 도우려 한다.

예컨대 영어가 원어민이 아니라면 아이 학교에서

최대한 행사 기획/운영, 아트 프로젝트 데코레이션

등 업무를 나서서 돕는 것이다.

무언가 의도성을 갖고 이렇게 하면 우리애가

더 튀겠지, 엄마가 움직이면 친구들도 붙겠지

이렇게 생활하지 않는다. 그런 부류 정말 싫다.


봉사하면 기쁘고 나도 하다보면 친구도 생기고

미국 사람들 사는 얘기 아이 얘기 하다보면 재밌을 뿐.

그제는 아이 학교 행사로 7시까지 학교에 가서

아이와 함께 행사 운영하고, 뒤에 정리하고 성과보고(진짜 놀랍게도 봉사일 뿐이나, 나름 회사처럼 돌아가는 걸보고 미국의 선진 문화를 또 체험했다)하고,

아이 학급 프로젝트 봉사 준비물을 받아들고 오니 오전이 훌쩍 흘러가 있었다. 어제는 곧 다가올 행사 준비 같이하는 인도친구 엄마랑 수다떨고, 학교 회의에서 만난 아이 옆반 중국인 친구 할머니랑도 한참 수다떨다 왔다. 오늘은 학교에서 오가다 자주 마주친 아이 옆반 백인 친구 업마가 합동 플레이데이트에 초대를 했다.

어째 난 미국에 온지 2년이 넘어서야 적응을 하고있는듯 한건지... 작년에는 한국 커뮤니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새 삶 자체가 많이 바뀐듯하다.


지금, 어쨌든 그래서 참 편하다
내 마음은 더 고요하고 평화롭다.

관계도, 정보도, 아이의 성장도
결국엔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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