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 와이프는 식모도, 벼슬도 아니야

4년짜리 신기루라 정의해본다

by 기록가 슈
주재원 와이프는 식모도, 벼슬도 아니야.png


미국 주재원 와이프를 두고
온라인에서는 가끔 이런 말이 돈다.
‘식모 비자’.


미국에 온 지 1년쯤 되었을 때
나는 예비 주재원 가족들을 위해
“그렇지 않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름 긍정의 모음집 같은 글이었다.


https://m.blog.naver.com/writer_chou/223670180424


그 어디에도 ‘주재원 와이프’의 정확한 정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회사 소속’으로 살아온
한국의 ex-워킹맘들에게
이 단어는 지금의 나를 가장 빠르게 설명하는 라벨이 된다.


워킹맘에서 주재원 와이프로.
역할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바뀌었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주재원 와이프는

식모도 아니고,
벼슬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두 단어 사이 어딘가에서
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 벼슬이 아니냐고?


솔직히 말하면
식모 비자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오늘은 굳이 “벼슬이 아니다”를 먼저 말하고 싶다.


주재원 가족은 미움받기 딱 좋은 포지션이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보험.
(미국은 공립이지만) 외국에서 학교 다니는 아이.


이민자들이 오랜 시간 고생하며 일궈놓은 것들을
우리는 비교적 빠르게 ‘패키지’처럼 누리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게다가 한국 사교육의 물을 어느 정도 먹은 아이라면
영어도 곧잘 하고, 학교 적응도 빠르며,
공부까지 잘하는 경우도 많다.


미울 조건은 충분하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가 지원해주는 시스템이고,
남편이 회사에서 버텨낸 결과이며,
나는 그 구조 안에 함께 놓인 사람일 뿐이다.


물론 가족에게는 최고의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특권이 ‘나의 성과’는 아니다.


한국 줌마 사회에서는
남편의 지위가 곧 나의 지위가 되고,
아이의 성적이 곧 나의 성적이 되는 착각이
생각보다 쉽게 일어난다.


나도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블로그 키워드를 괜히 “주재원 와이프”로 잡았나?

괜히 싸가지 없어 보이나?


사실 큰 의미를 둔 건 아니었다.
워킹맘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그 변화를 기록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재원 와이프”라는 단어가 검색어에 오르내리고,
데이터상으로도 뜨거워졌다.


그만큼 이 위치에 선 사람들이 많아졌고,
생각을 공유하는 아내들도 많아졌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


내가 인스타를 멀리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발령이 나기도 전에
대환장 파티가 시작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대기업은 보안이 생명이다.
서약서를 쓰고, 매년 갱신하고,
퇴사할 때도 주요 항목으로 점검한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회사 관련 내용이 SNS에 올라온다.

내 회사도 아니기에 어쩌면

더 조심해야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출장지에서의 일거수일투족,

고객사 미팅 이야기와 사진들,

회사 세부 지원 내역들까지.


회사마다 지원 범위도 다르고

민감한 정보의 기준도 다르다.


또, 미국을 포함한 외국에서는
아이의 초상권과 SNS 노출에 매우 민감하다.
그런데 외국인 친구가 생겼다고
아이 얼굴을 그대로 올린다.


“나는 괜찮은데?”가 아니라
“혹시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감각 정도는
우리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일부의 과한 과시가
“주재원 와이프가 벼슬이냐”는 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말은 결국
같은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같이 때린다.




자처하면, 식모가 될 수도 있다


식모 비자라는 말이 억울하다고 썼지만
솔직히 이런 고백도 해야겠다.


자처하면, 식모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첫 1년 동안
꽤 성실하게 식모를 자처했다.


집은 늘 반짝이게 닦아두고,
삼시세끼 집밥에,
도시락도 정성스럽게 싸고,
꽃을 사다 꽂으며 집안 분위기까지 바꾸었다.


그야말로 혼자 새댁놀이를 했다.

엄마들 모임에 휩쓸려 다니며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삶’에 몰두했고,
라이드 인생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걸
은근한 성과처럼 여기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메이드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아니, 어쩌면 메이드가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내가 모든 교육을 엄마표로 설계한 것도 아니고,
결국 문제집을 풀리고
공부 습관을 잡아주는 정도였으니까.


그때 나는
열심히는 했지만,
확장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미국에서의 식모는..
그래도 조금 멋있지 않나?


세계 GDP 1위 국가에서
경제 흐름과 과학기술의 최전선을
눈앞에서 보는 식모라면 말이다.


사기업에서 오래 일했던 사람으로서
이 환경은 꽤 자극적이었다.


테슬라가 도로를 달리고,
엔비디아가 세상을 뒤흔들고,
AI가 일상이 되고,
자율주행 택시와 배달봇이 돌아다니는 나라.


그 흐름을 생활권 안에서 체감하는 일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미국에서 다시 공부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이 역시
글로벌 탑 기업과 기술을
교과서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본다.


이건
단순히 집밥을 잘 차리는 능력으로만
정리하기엔 아까운 기회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식모가 될지,
관찰자가 될지,
기록자가 될지,
공부하는 사람이 될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주재원 와이프라는 위치는
나를 작게 만들 수도 있고,
확장시킬 수도 있다.


자처하면 식모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남편의 직함도 아니고,
회사 패키지도 아니고,
아이 성적표도 아니다.


잠시 다른 나라에 와 있을 뿐,
여전히 스스로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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