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를 읽고
오랜만에 샹송을 듣습니다. 20여 년 전에 들었던 노래들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들어봅니다. 프랑스어를 모르니 지금 들리는 노래가 어떤 내용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샹송은 언제나 제 가슴에 그리움의 파도를 만들어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읽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아침 저는 샹송을 듣습니다. 혼자서.
조선시대에 살았던 여성들이 썼다는 편지를 보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서점에 들러 잠시 책을 보고 있는데 ‘파리’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라는 책이었지요. 책의 띠지를 보고 저는 잠시 흥분했습니다. ‘한국의 피카소 김환기가 평생을 사랑한 여인 김향안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문장 때문이었지요. 안 그래도 당신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자료를 찾다 당신의 남자가 당신에게 보냈다던 수많은 편지에 관한 글을 보았거든요. 환기미술관에 찾아갈 예정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편지를 보고나서, 며칠 쯤 있다가 그러려던 참이었지요. 그런데 당신이 이야기가 담긴 책을 발견했습니다. 라디오를 쓴다는 정현주 작가의 책이었지요.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조곤조곤, 심야방송 디제이의 속삭임처럼 그녀의 문장이 내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변동림과 김향안. 당신이 세상에 남기고 간 두 개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신을 김향안으로 기억하고 있지요. 당신도 당신이 그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바랐고요. 천재 시인 이상의 부인이었던 당신이 이상과 사별한 후 김환기를 만나 새롭게 출발하면서 얻게 된 이름, 김향안으로요. ‘시골 언덕’이라는 뜻의 향안(鄕岸)은 원래 김환기의 어릴 적 이름이었다죠. 자신에게 온 당신을 위해 자신의 옛 이름을 선물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면서요. 그래서 동림이었던 당신은 향안이 되었고, 환기였던 남자는 수화(樹話), 나무와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화가 당신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으면서 저는 옛 기억들과 만났습니다. 언젠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보았던 그림들과 편지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죠.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진 작품이 수화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전시장 한 편에 마련돼 있던, 그림이 유난히 많았던 편지가 수화가 당신에게 보냈던 편지들이었다는 것도요. 기억을 더듬어 그 날의 풍경을 떠올리니 파리 거리에서 찍은 당신과 수화의 사진이 보였습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에도 나오는,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걷는 두 사람의 사진 말이에요.
수화가 당신에게 보냈다던 편지 중에 제가 좋아하는 편지는 수화가 1955년에 그리고 쓴 편지입니다. 작년 ‘한글편지전시’에서 제 발을 한참동안 묶어놓았던 편지였죠. 우거진 초록 산을 머리에 이고 있던 푸른 기와, 나무로 만든 대문, 적색의 벽돌, 그리고 몇 개의 층계... 당신과 수화가 살았던 집이라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집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한 참을 서서 바라보았지요. 그리고 그림의 빈 공간에 수화가 써 내려간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1955년 멀리 파리에서 처음 성탄을 맞이하고 있을 나의 향안에게 행복과 기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눈개비 날리는 성북동 산 아래에서 으스러지도록 안아준다. 너를. 나의 사랑 동림이. 수화”
당신과 수화가 걸었던 인생의 길들은 어쩌면 그 길에서 주고받은 편지들 덕분에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화가로는 경매 낙찰 총액 1위라는 수화에게 코트 한 벌 마련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수화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 전에 당신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소울메이트였다는 것도, 수화가 피카소를 사랑하여 그를 닮고 싶어했다는 것도 지상에 남겨진 편지 덕분에 더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책을 읽으며 영혼의 대화를 나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와 영혼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내 영혼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까... 생각의 끝에 당신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당신과 만나 영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곧, 당신들의 편지를 찾아 가려고 합니다. 당신이 수화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환기미술관에 가면, 당신들의 편지가 있겠지요. 당신과 수화에 관한 책과 전시 도록들도 구입해 당신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당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아주 오래 전의 저를 만날지도 모르니까요. 당신들이 사랑했던 프랑스에 청춘의 한 조각을 묻은 저를요.
방 안 가득 샹송이 흐릅니다. 마침 비까지 내려 마음이 촉촉해집니다. 환기미술관에 다녀와서 다시 소식 전할게요. 당신과 수화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 정현주 작가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요.
‘사랑은 지성이다’라고 말했던 당신을, 저는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2016년 7월 29일 금요일, 비 내리는 서울에서 글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