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편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마을의 끝자락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만덕산으로 이어지는 흙길이 나옵니다. 숨을 고르며 비탈진 길을 오르고 올라 도착하는 곳은 다산 정약용이 머물렀던 유배지, 다산초당이지요. 이곳은 정약용의 실학이 집대성된 곳으로 유명하지만, 제게는 폐족 된 가장이 자녀들에게 눈물로 편지를 쓴 가슴 아픈 공간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정조 시대에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실학자 정약용은 순조가 즉위하면서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습니다.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으로 지목되면서 포항 장기로 유배형을 받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강진으로 이배되지요. 그 후 정약용은 18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됩니다. 당시 정약용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지만, 다섯 명의 아이가 요절하고 3남 1녀만이 남았던 것이지요. 정약용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냅니다.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자녀들이 조금이라도 더 올바르게 클 수 있도록 가르침을 전하기도 했고, 때로는 유배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막의 골방에서 생활하고 있던 정약용에게 비보가 전해집니다. 막내아들 농아가 마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지요. 세상에 온 지 세 해 밖에 되지 않은 막내아들 농아가 생일날 묻혔다는 소식을 받은 정약용은 비탄에 잠깁니다. 그리고 붓을 들어 아들의 무덤에 바치는 편지를 쓰지요. 이 편지가 바로 ‘농아광지(農兒壙志)’입니다. ‘농사짓는 아이’라 불렀던‘농아의 무덤에 바치는 마음’이라는 뜻이지요.
“네가 세상에 왔다가 세상을 떠나간 것은 겨우 세 해뿐인데, 그 두 해를 나와 떨어져 살았구나. 사람이 60년을 산다면 40년을 아버지와 떨어져 산 것이니 슬프기 그지 없구나”
이렇게 시작되는 편지는 농아에 관한 추억으로 채워집니다. 유배 떠난 아버지가 돌아올 것을 의지 삼으며 투병하던 농아의 모습과 아버지가 이웃 편에 보낼 소라껍질을 기다리며 의기소침해 있는 농아의 모습,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소라껍질이 농아가 죽고 난 후에 도착했다는 글이 서러운 문장으로 적힙니다. 그리고 아들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는 아비의 다짐처럼 농아의 생김새가 기록되지요. 빼어나게 생겼던 얼굴과 웃을 때 송곳니가 뾰족하게 드러나던 농아의 모습이 아버지가 쓰는 마지막 편지에 새겨집니다.
강진 주막의 골방에서 눈물의 편지를 썼던 정약용은 몇 년 후 지금의 다산초당 자리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 동네에 자리를 잡고 있던 외가의 도움으로 초가 하나를 마련하게 된 것이지요. 정약용은 이곳에서도 남은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씁니다. 폐족 된 가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학문을 해야 하는지 한지 위에 한 글자 한 글자씩 써가며 마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정약용이 이 시기에 쓴 편지 중에 특별한 편지가 있습니다. 종이가 아닌 치마폭에 쓴 ‘하피첩’과 ‘매조도’라 불리는 편지이지요. 정약용은 왜 종이가 아닌 여인의 치마폭에 편지를 썼을까요? 거기에는 그만의 사연이 있습니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10년 째 유배생활을 하던 어느 날, 부인 홍혜완이 몇 벌의 옷을 보내옵니다. 그것은 둘이 혼인 하던 날 홍부인이 입었던 옷이었지요. 아이 다섯을 제 손으로 묻고, 막내아들은 남편도 없이 홀로 땅에 묻어야 했던 아내, 먼 곳으로 유배 간 남편을 기다리며 낡은 치마처럼 빛바래며 늙어 가고 있던 아내…. 그녀가 유배지에 있는 남편에게 아무 말 없이 혼인하던 날 입었던 옷을 보낸 것은 어쩌면 그 날의 마음을 잊지 않고 남편을 기다리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정약용에게도 그때의 마음을 잊지 말고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는지도 모르지요. 홍부인의 애틋한 마음을 받은 정약용은 그 치마를 잘라 아들과 딸에게 편지를 씁니다. 두 아들에게는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써 첩으로 만들어 보내고, 딸에게는 매화나무 위에 내려앉은 한 쌍의 새 그림과 시 한수를 지어 결혼 축하편지를 보냅니다. 어머니가 시집 올 때 입고 왔던 치마를 잘라 시집가는 딸에게 편지를 쓰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홉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여섯 명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 살아남은 자녀와 함께 살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떨어져 살고 있는 아버지. 그는 아내가 보내 준 치맛자락에 자녀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적어 보냅니다.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달라고,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너희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해마다 봄이 되면 다산초당에 앉아 편지를 쓰는 정약용을 떠올려 봅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낯선 유배지에서 홀로 눈물을 삼켰을 아버지, 얼굴을 맞대고 가르칠 수 없어 날마다 먹을 갈아 편지를 써야했던 아버지, 사랑하는 딸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아내가 보내온 치맛자락에 축하편지를 썼던 아버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쓴 편지를 읽으며 이 나라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을 봄의 아버지, 어머니들을 기억합니다. 제주에서, 팽목항에서, 마산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찬란한 봄, 눈부신 아이들을 가슴에 묻어야했던 ‘봄의 어버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부디 하느님께서 그들의 위로자가 되어 주시기를,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나의 작은 기도가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적이 되기를 말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신비로운 봄,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작은 기도소가 됩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8년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