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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May 09. 2021

3. 맥거핀, 그건 왜 갑자기

헌병은 서서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훈련소는 소셜믹스의 현장이었고 나는 초반에 낯가림이 심했다. 그러던 중 아마도 '서울, 대학생'인 것으로 보이는 형 B와 말할 기회가 생겼다. 뭔가 하기 위해 줄을 서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대기하는 시간이 길었는지. 실제로 정말 많이 대기했거나, 상대적으로 시간이 너무 안갔거나 혹은 둘 다 일지도. 아무튼, 나는 B의 입에서 훈련소 안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도 못한 단어를 듣게 되었고, 그 이후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형은 뭐 좋아해요?"


"나는 영화, 영상 같은 거 좋아하지."


"형 전공이 뭔데요?"


"나? 철학과"


"오~ 철학과... 좀 멋있네요"


"아 그 단어 뭐더라, 영화에서 뭐 안 중요한데 중요한 척 이야기 끌고가는 장치로 쓰는 거... 

아 뭐지. 뭔지 알아요? 생각 안나니까 갑자기 궁금하다."


"맥거핀 말하는거지? 그건 왜 갑자기."




다시 생각해봐도 이상한 맥락이다. 아마도 나는 당시 입대 전 들었던 영상예술 교양수업에서 처음 알게 된 '맥거핀'이란 단어가 썩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어느 방면으로든 전부 황량한 훈련소 안에서 비교적 최근에 습득한 지적인 단어를 떠올리며 정신적 탈영을 꿈꾸었던 것일까. 사실 나도 영상에는 문외한이라 교양수업 하나 들었던 것 말고는 밑천이 전혀 없는데, '맥거핀'이라는 낯선 단어를 억지로 떠올리면서까지 내가 B에게 기대한 것은 무엇일까. 이 지적 황무지에서 나를 꺼내주길 바랐던가.


B는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철학이라는 범상치 않은 전공도 그랬지만, 사람 자체가 조용한 관종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소대에는 B를 졸졸 따라다니는 호기심 많은 동생도 있었다. 그 동생 C는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기술을 배워 바로 대기업에 취직한 경우였는데, 대학생이었던 내가 듣기에 대우가 상당했던 것 같다. C는 아마 B가 풍기는 낯선 향기, 말하자면 형이상학의 냄새에 이끌렸던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B는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듯 보였다. 마치 장자 같은 사람이었는데, 얼굴은 한가인을 닮았다. 소대원 중 누군가 '한가인'을 언급한 이후로는 그의 얼굴에서 한동안 '한가인'이 보였다.


B는 겁이 많은 내가 군대의 권위에 미시적으로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물건을 오른손에 쥐고 대각선으로 걷는 등)을 아는 듯 했고, 그 또한 철학과이면서 동시에 참군인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양립불가능한 명제이다. 그런 B가 나보다 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가 종교활동에 가서 일간지를 훔쳐온 때였다.


한 달 째 훈련소에 갇혀서 뉴스도 못보고 생활하던 우리는 바깥 소식에 목말라 있었다. 훈련병이 세상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는데, 굳이 알고자 한다면 의무대에 가서 잠깐 공용 티비가 켜져 있는 로비를 지나갈 때 YTN 채널을 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뉴스를 보기 위해 의무대까지 갈 정도로, 타는 갈증을 느꼈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B가 청소시간에 나를 빈 내무반으로 조심히 불렀고, 거기엔 일간지가 있었다. <한겨레>였나. 신문사까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튼 신문을 훔쳐오다니! B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했다. 사실 신문의 내용보다도 그 일탈의 경험이 주는 청량감이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몰래 뭔가를 꾸몄던 그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잘한 일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구독하는 신문이란 것은 그 날이 지나면 효용을 잃기 마련이지 않은가. 쌓여 있던 신문더미에서 한 부를 가져온 것 정도는 우리의 불온한 사상에 비하면 손톱의 때 같은 잘못이었다. 


그 신문은 몰래 읽고 안쓰는 관물함 위로 던져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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